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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저변확대의 인큐베이터  전국체육대회

1955년 10월 15일, 그날도 어김없이 가을하늘은 맑고 높았다. 전쟁의 상처는 채 아물지 않았지만 들판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가고, 때마침 강화도 마니산 꼭대기 참성단에서는 그날따라 아주 특별한 행사가 거행되고 있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곳에서 건국 이래 처음으로 제36회 전국체육대회 성화를 채화하는 행사가 열렸던 것이다. 공식명칭은 ‘전국체육대회’였지만 사람들은 ‘전국체전’이라고 불렀다.

제33회 전국체육대회 마스게임 썸네일 이미지
제33회 전국체육대회 마스게임(1952)
정부수립 10주년 제39회 전국체육대회 성화점화 썸네일 이미지
정부수립 10주년 제39회 전국체육대회
성화점화(1958)
제44회 전국체육대회 수상경기 썸네일 이미지
제44회 전국체육대회 수상경기(1963)

원래 이 전국체육대회는 1920년 11월 당시 조선체육회가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개최한 제1회 전(全) 조선야구대회를 기원으로 삼기 때문에 1955년 대회가 36번째가 되는 셈이다. 더욱이 그 이전에는 한 번도 성화를 채화하거나 봉송한 적이 없었는데, 이날부터 비로소 성화봉에 불을 붙여 전국체육대회 경기장까지 릴레이하게 되었다. “겨레의 단결심과 인내력을 기르고, 준법정신을 생활화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깨우치며, 나아가 강인한 체력과 슬기로운 민족의 저력을 배양해 세계에 국위를 선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때 출발한 전국체육대회의 원래 목적이며 취지였다.

그러나 전국체육대회는 처음부터 의외의 암초에 부딪쳤다. 함부로 체통 없이 뛰거나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우리네의 오래된 양반풍습과 인식 때문에 그 당시는 전국체육대회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체육행사가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오죽하면 최초로 개최된 체육행사에 하인이나 머슴을 대신 내보냈겠는가. 그러다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종목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족의 사기는 충천했고, 이것이 민족단결의 한 방편임을 알게 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반대로 일제가 오히려 조선체육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체육대회를 빙자한 조선인의 단결이 눈에 띠게 나타나자 1937년에 개최된 제18회 대회를 끝으로 아예 전(全)조선종합경기대회를 중단시켜 버렸다. 그 후 전국체육대회는 사실상 열리지 못하다가 마침내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활하고, 1948년부터 정식명칭인 ‘전국체육대회’로 거듭나 어렵게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전국체육대회라는 이름으로 대회를 개최한 원년이 되는 그 1948년에는 서윤복 선수가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해 ‘마라톤 한국’의 이름을 새삼 세계만방에 떨치기도 했다.

곧 이어 6.25전쟁이 발발하지만 전국체육대회는 계속되었다. 전쟁 중이던 1951년에 열린 제32회 전국체육대회는 피난지 광주에서 임시로 개최되었다. 어떠한 난관이 닥치더라도 전국체육대회만은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55년 10월 15일 제36회 대회 때부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성화를 채화해 전국을 내달리는 새 역사가 펼쳐졌다.

생각해 보면 전국체육대회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참으로 숱한 시련과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대회를 지켜내려는 의지와 노력에서 전국체육대회는 점점 진화발전하고 있었다. 급기야 1957년 제38회 대회부터는 지방체육의 발전과 보급, 저변확대를 위해 주로 서울에서만 열던 대회를 부산, 대전, 전주, 광주 등지를 돌아가며 개최하기도 했다. 1963년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대회에서는 참가선수의 70%를 일반 민가에 묵게 하는 민박제도를 실시함으로써 향토 간에 유대를 다지는 성과도 얻었다.

제40회 전국체육대회 썸네일 이미지
제40회 전국체육대회(1959)

1965년 광주에서 개최한 제46회 대회에서는 산업박람회까지 열었다. 특히, 이 대회부터는 역도 라이트급의 주니어세계신기록과 육상 등에서 여러 개의 한국 신기록과 대회신기록이 쏟아져 나왔다. 스포츠 분야의 우리의 경쟁력이 세계 수준을 넘보기 시작했다는 증거라고 말들을 했었다. 1968년 제49회 전국체육대회에서는 늘 우승을 독차지하던 서울을 제치고 처음으로 지방 팀인 경상북도가 우승기를 가져갔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이 49회 대회부터 처음으로 입장식이 실시되고 개회식과 폐회식 때 카드섹션이 요란하게 펼쳐졌다.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을 한 선수들이 각자 자기고장으로 돌아가면 온통 경축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지방에 따라서는 대대적인 금의환향 행사까지 열어주었다. 그러니까 이맘때부터 전국체육대회가 우수 선수 발굴 등 스포츠강국으로 가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추후 미래의 한국스포츠가 각종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거나 우승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우수선수를 발굴하고 키워내는 과정을 전국체육대회가 맡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1978년에 개최된 제59회 대회에서는 양궁의 박영숙 선수가 최초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고, 그 다음 다음 대회에서도 양궁에서 세계신기록이 쏟아져 한국 양궁이 세계를 제패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예고했다.

제60회 전국체육대회 썸네일 이미지
제60회 전국체육대회(1979)

모든 종목에서의 선수 발굴이 전국체육대회를 통해 갈수록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72년 제53회 대회 때부터는 초·중등학교가 전국소년체육대회로 분리·운영되기 시작했고,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와 같은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체력은 국력”이라는 슬로건이 가는 곳마다 내걸렸다. 국력신장과 함께 스포츠강국으로 가는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제55회 전국체육대회 복싱 썸네일 이미지
제55회 전국체육대회 복싱(1974)
제70회 전국체육대회 개막식 썸네일 이미지
제70회 전국체육대회 개막식(1989)
제80회 전국체육대회 개막식 썸네일 이미지
제80회 전국체육대회 개막식(1999)

시작은 비록 미약했으나 그 결과는 참으로 장대했다고나 할까. 처음에는 마치 무슨 동네단합대회나 친목모임처럼 출발했지만, 실로 엄청난 역사적 파란과 소용돌이를 겪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이어온 은근과 끈기로 한국스포츠 도전의 역사는 기록되었다. 그것은 곧바로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올림픽과 같은 국제스포츠대회의 성공적인 개최와 거기서 거두게 되는 막강한 성적으로 나타났다.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도 따지고 보면 이 전국체육대회가 뿌린 씨앗이며 결실이었다. 1984년의 제61회 전국체육대회는 이 두 가지 국제스포츠대회를 앞두고 여러 가지 경험을 쌓는 사실상의 예행연습 내지는 학습효과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경기운영의 전산화와 국제경기 방식의 채택, 그리고 관중들의 카드섹션 등에서 우리나라의 국력과 스포츠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전 지구촌에 확인시켜주는 계기로 삼았다.

어느새 백 살이 다 돼 가는 전국체육대회는 지금도 스포츠강국으로 가는 강력한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내고 있다.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브리태니커, 한국브리태니커회사
  • 체육부, 『체육한국』, 체육부, 198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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