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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새롭게 한 힘 4H운동

깨우침이란 사람을 설레게 하는 말이다. 그 말 속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만족감, 자신의 시야가 넓어졌다는 기쁨이 담겨있다. 무언가를 깨우치기 전과 깨우친 후의 사람은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고를 하는 다른 사람이 된다.

실천의 힘을 믿다. 4H운동

농촌계몽운동인 4H운동은 바로 이러한 깨우침을 위한 운동이었다. 농촌계몽운동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들이 있다. 이광수의 소설『흙』과 심훈의 소설『상록수』. 농촌 출신 고학생이 야학을 열어 농촌 사람들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쳐주는 모습. 그것이 우리에게 농촌계몽운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하지만 4H의 계몽운동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4H운동은 Head(두뇌), Heart(마음), Hand(손), Health(건강). 이 네 단어의 첫 글자를 따 부른 것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Hand, 손이다.

"과거의 농촌운동이 몇 번이고 일어나다 흐지부지된 것은 그 운동방향이 잘못 설정됐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1972년 4H 경진대회 발언 中
(경향신문 1972년 4월 4일자, 매일경제 1972년 4월 5일자 기사)

Head와 Heart는 지(知)와 덕(德)으로 해석됐다. 합리적인 사고와 그 사고의 기반이 되는 건강한 마음이 4H운동의 정신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거기에 Health 즉, 건강을 의미하는 체(體)는 개인의 건강한 삶과 건전한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 4H운동의 목적임을 강조하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Hand, 손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노(勞)라는 단어로 대체되었지만, 노(勞)는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Hand는 4H운동이 ‘실천’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김을 나타내고 있다. 한마디로 머리와 마음으로 느끼고 알게 된 일을 내 ‘손’으로 실천할 때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기존 농촌계몽운동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깨우치는 것에 머물렀다면, 4H운동은 아는 것을 넘어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4H운동의 역사

19세기 말 미국에서 시작된 4H운동은 1947년 경기도 군정관이던 찰스 앤더슨(Charles A. Anderson) 중령과 구자옥 경기도지사가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 미국에서는 이 운동이 급격한 공업화로 농촌경제가 위축되면서 농촌을 지킬 후계 세대가 줄어든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시작된 것이지만, 우리가 전개한 4H운동은 다른 배경 속에서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과 광복을 거친 뒤 연이어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황폐해진 환경을 하루빨리 개선하고 국가 발전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것으로, 4H운동이 가진 실천적 방향은 우리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각 시·군에 결성된 농촌청년구락부다. 당시 클럽을 일본 음역으로 ‘구락부’라 불렸는데, 정확한 명칭은 ‘4H클럽’이다.

4H 구락부 발기식 관계자 증서 수여 참고 이미지
4H 구락부 발기식 관계자 증서 수여
(1955)
이승만 대통령내외 소년 4H구락부 각도 대표 접견 참고 이미지
이승만 대통령내외 소년 4H구락부
각도 대표 접견
(1958)
제5회 중앙4-H구락부 경진대회 참고 이미지
제5회 중앙4-H구락부 경진대회
(1959)
4H 구락부 실연대회 참고 이미지
4H 구락부 실연대회
(1956)
4H 구락부 실연대회 참고 이미지
4H 구락부 실연대회
(1956)
4H 구락부 실연대회 참고 이미지
4H 구락부 실연대회
(1956)

“나는 더욱 명석한 생각, 더욱 충성된 마음, 더욱 봉시적인 손, 더욱 잘 살기 위한 건강으로 나의 클럽, 나의 동리, 나의 조국에 헌신하기로 맹세한다.”(「4H클럽 회원의 맹세」, 경향신문 1955년 6월 2일자 기사)

4H클럽은 마을의 소년과 소녀로 구성된 농촌의 조직체다. 클럽마다 남녀 지도자가 한 명씩 있어서 클럽 회원들의 개인적인 계획과 실천기록을 점검하고 그들의 농촌 및 가정생활에 관한 연구를 감독했다.

농촌을 위한 교도원의 활동_과학기술과 지식 보급, 4H클럽 활동 참고 이미지
농촌을 위한 교도원의 활동_과학기술과 지식 보급, 4H클럽 활동(1958)

1950년 6.25전쟁 직전에는 경기도 내 4H클럽 수는 1,900여 개, 회원 수는 5만 명에 달하였다. 그 뒤 6.25전쟁으로 조직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1952년부터 당시 농림부와 내무부가 협력하여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추진하였다. 4H운동은 농촌 발전에 뜻을 둔 많은 인사가 참여해 왔고 많은 사회지도자를 배출하였으며, 영농 과학화를 중심으로 농촌 발전을 이끄는 주역을 맡아왔다.

젊은 과학영농인_4H회원 참고 이미지
젊은 과학영농인_4H회원(1992)

“어디를 지나가다가 동네 입구에 클로버 잎 모양의 표지 속에 네 개의 H자가 들어있는 곳은 먼저 신뢰감이 생기고 그 동네를 들어가 보면 무엇이고 다른 것이 있어 마음을 흡족하게 만든다.”(「이항녕 칼럼-잊어버린 4H」, 경향신문 1981년 12월 11일자 칼럼)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4H운동과 클럽은 명맥을 이어가는 수준으로 약화되면서 침체기에 접어들었지만,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4H운동은 그 상징인 네 잎 클로버처럼 우리에겐 행운의 기회가 되어 주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지금보다 더 행복한 미래가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힘. 그것은 4H운동이 가졌던 실천의 힘, 바로 ‘손’의 힘이었다.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경향신문, 「“자발적 생산운동을” 박대통령, 4H 경진대회 치사」, 1972.4.4.
  • 경향신문, 「이항녕 칼럼 - 잊어버린 4H」, 1981.12.11
  • 경향신문, 「4H 클럽 회원의 맹세」, 1955.6.2.
  • 김진모 외, 「학교 4-H의 활성화 방안」, 『농업교육과 인적자원개발』 38, 200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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