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석탄개발은 1896년 러시아 사람 니시첸스키가 함경도 경성과 경원지방의 석탄채굴권을 획득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석탄이 개발된 것은 1903년 궁내부 내장경 이용익이 프랑스의 용동상회와 평양 사동탄광을 합동 개발한 것이 최초였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1915년 12월부터 「조선광업령」, 「조선광업령시행규칙」 등을 제정하면서 우리나라의 자원수탈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고 우리 광물을 합법적으로 채취해갔다. 당시 우리의 광물은 착취 대상 1호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석탄의 수요가 증가하자, 일본은 아오지 탄광 개발을 확대하고 남한지역 탄광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탄광 역시 군정청으로 모두 귀속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는 석탄증산을 위해 노력하였고, 전쟁 중에도 1950년 11월 1일에 '대한석탄공사'를 발족하였다. 6.25전쟁 이후 정부는 석탄운반을 위한 철도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61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면서 석탄증산을 위한 적극적인 사업을 펼쳤다. 그 결과 1966년에 1,161만 톤의 석탄을 생산함으로써 석탄의 자급자족을 실현할 수 있었으며, 석탄은 우리에게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1965년 가을부터 연탄수요가 많아지면서 서서히 연탄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1966년 여름, 연탄이 잘 팔리지 않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연탄 수요가 급증하더니 설상가상으로 그 해 겨울 한파가 들이닥치면서 연탄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웃돈을 주고도 연탄은 구하기 어려웠다. 당장 서민들의 난방연료가 시급한 상황이 되었다. 연탄파동이 나자 정부는 에너지정책을 석탄위주에서 유류위주로 전환하였다.
연료정책의 변화로 1967년 7월부터 석탄 수요는 서서히 감소세로 돌아섰다. 1967년 초 200여개에 이르던 탄광은 1969년에 50개소로 감소하였다. 연탄파동을 계기로 쇠퇴의 길을 걸었던 석탄 산업은 1973년과 1978년에 발생한 석유파동으로 인해 다시 호황을 맞게 되었고, 또다시 연탄품귀현상이 발생했다. 화력이 약하고 질이 나쁜 저질탄까지 나돌아 서민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정부는 가정용 연탄 공급의 확보를 위해 목욕탕과 다방, 음식점 등에서는 연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1가구당 1회 20장 이상 판매 금지, 연탄구매카드제, 연탄판매기록장제 등 다양한 제도를 시행하였다.
1980년대 중·후반에 국제 유가는 안정되었고, 화석연료를 대신할 청정에너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져 가정용 연료로 가스가 보급되었다. 가스의 보급으로 인해 연탄의 사용량, 무연탄의 소비량은 크게 줄어들었다. 석탄 산업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사회 경제적 손실이 막대할 것이라는 이유로 1987년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이 설립되어 석탄산업의 합리적인 발전을 위한 각종 사업이 수행되었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모두 334개의 탄광이 폐광되었으며 2017년 현재 대한석탄공사 산하 강원도 태백시의 장성광업소, 강원도 삼척시 도계광업소, 전남 화순군 화순광업소에서 무연탄을 생산 중이며, 민영탄광으로는 강원도 삼척시의 (주)경동 상덕광업소, 강원도 태백시의 (주)태백광업이 운영 중이다.
탄광산업의 전성기인 1960년대에는 급증하는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탄광이 개발되었고, 노다지를 캐려는 사람들과 실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화전민들만 올망졸망하게 모여 살던 산간지역은 탄광이 개발되면서 거대한 탄전지대가 되었다. 탄광 개발붐이 한창일 때에 탄광촌은 전국에서 가장 경기가 좋은 지역의 하나였다. 그 시절 탄전지대의 노동자들이었던 광부들은 어떤 하루를 살았을까?
그 시절 탄광에서는 8시부터 16까지 갑방, 16시부터 24시까지 을방, 24시부터 8시까지 병방이라고 해서 3교대로 1주일씩 바꿔서 근무를 했다.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은 물론이고 광부가족들은 한 집에서 얼굴을 마주 보는 기회도 적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가족관계가 해체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탄광 일이 다른 직종보다 노동 강도도 높고 무엇보다 작업장 환경이 좋지 않아 항상 크고 작은 사고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안전에 대한 금기사항이 아주 많았다. ‘전날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면 출근하지 않는다’, ‘도시락에 밥을 4주걱 푸지 않는다’, ‘갱내에서는 휘파람을 불거나 뛰지 않는다’ 등 다양한 금기가 탄광촌에 존재했다.
을방 광원들이 갱 입구에 도착하면 일을 마친 갑방 광원들이 탄가루와 땀으로 온 몸이 뒤범벅된 채 갱 입구로부터 몰려나온다. 그들이 갱에서 나오면 먼저 찾는 곳은 목욕탕이다. 갑방 광원과 엇갈려 을방 광원이 갱 입구로 들어선다. 인차를 타고 18도의 경사를 초속 3 내지 5km의 속도로 달려 2백50여m 아래 갱으로 간다. 갱도는 탄을 실어 나르는 광차 옆으로 사람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좁고 채굴 도중 무너질 위험이 높은 곳인데다가 산소가 부족하여 아주 위험한 곳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경사진 길을 따라 10여m 올라가면 채탄막장이 나타난다. 막장은 탄광의 맨 끝부분이나 그곳에서 일하는 인부를 칭하는 말로 지하 수십, 수백 미터에서 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석탄가루를 마셔가며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던 탄광의 마지막 장소이다.
힘들게 일해도 월급을 받을 때는 좋았다. 월급은 돈으로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배급소에 가서 근무성적에 따라 쌀이나 잡곡을 배급받았다. 이것을 도로 현찰과 바꿔 쓰기도 해서 탄광촌 월급날이면 광부들로부터 쌀을 사려는 장사치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탄광촌의 이발소나 식료품점에는 현찰대신 배급받은 전표를 내면 되었다.
탄광촌에서 제일 힘든 날은 탄광사고가 나는 날이다. 막장은 낙반, 붕락, 발파, 가스 질식 등 다양한 치명적 사고에 늘 노출되었다. 1978년부터 1987년까지 10년간 석탄 산업 재해로 사망한 수는 총 1,749명으로 매년 평균 175명이 탄광 사고로 사망했다. 마스크도 해결하지 못하는 탄가루는 더욱 무서운 존재다. 돌가루, 탄가루 등이 호흡을 통해 폐에 쌓여 폐가 돌처럼 굳어지는 진폐증은 광부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존재였다.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중추역할을 했던 광부들은 이제 그 인원이 많이 줄었다. 2016년 말 기준으로 대한석탄공사 산하 3개 탄광과 2개의 민영탄광에서 일하는 인원은 3,200여 명 정도 되는데 이 숫자는 사무 행정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포함된 숫자이다. 때문에 실제로 갱내에서 직접 생산 작업을 하는 광부의 수는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