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메뉴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내용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소년체육대회 :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나라도 튼튼

1972년 6월 전남 신안군 안좌면 안좌서초등학교 사치분교의 농구 선수들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사치분교는 목포에서 뱃길로 4시간이나 걸리는 외진 곳에 있으며, 그곳 농구선수들은 나무와 사과궤짝으로 만든 농구대에 짚을 새끼줄로 감아 만든 공으로 농구 연습을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농구 연습을 해 왔던 이들은 그해 6월 17일 장충체육관에서 경남대표인 가야초등학교와의 경기에서 61대 58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고, 제1회 소년스포츠대회 농구경기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들을 지도했던 부부교사와 선수들은 감격에 겨워 목 놓아 울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많은 국민들도 함께 울었다. 사치분교의 농구 선수들이 소년스포츠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은 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제2회 전국 스포츠 소년대회. 입장식 썸네일 이미지
제2회 전국 스포츠 소년대회. 입장식(1973)
제3회 전국스포츠소년대회. 개회식 매스게임 썸네일 이미지
제3회 전국스포츠소년대회. 개회식
매스게임(1974)
제5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육상 썸네일 이미지
제5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육상(1976)

소년스포츠대회에서 전국소년체육대회로

사치분교 학생들이 농구 경기에서 준우승을 했던 소년스포츠대회는 전국의 초등학교, 중학교 선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신의 기량을 겨루던 종합경기대회였다. 1971년 이전에는 전국체육대회의 중등부에서 실시되어 왔으나, 초등학생부와 중학생부를 분리시켜 단독 대회로 개최하게 되었다. 단독 대회로 개최한 것은 전국체육대회의 규모가 비대해 졌다는 이유도 있지만, 자라나는 소년·소녀에게 기초적인 스포츠를 보급하고 스포츠 정신을 고취하며, 학교체육의 활성화는 물론 체육 인구의 저변 확대 및 생활체육 기반을 조성하고 우수 선수의 조기 발굴을 통한 스포츠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초·중등 선수들만이 대회를 치를 경우 그들의 수준에 맞는 기량을 펼쳐 보일 수 있으며, 각 시·도 선수들끼리 우정을 나누는 등 전인적 교육 효과도 클 것이라는 판단 하에 대회를 독립시켰던 것이다.

[대한뉴스 제1034호] 전국소년체육대회
[대한뉴스 제1034호] 전국소년체육대회(1975)

1971년 6월 16일 동대문운동장(구 서울운동장)에서 11개 시·도의 스포츠소년단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전국스포츠소년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대회의 정식 명칭은 ‘스포츠소년단 창단 기념 제1회 전국스포츠소년대회’였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나라도 튼튼’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시작한 제1회 전국스포츠소년대회는 서울에서 개최되었는데, 육상, 수영, 축구, 야구, 배구, 농구, 탁구, 핸드볼, 체조, 배드민턴, 씨름, 테니스, 연식정구, 럭비풋볼, 유도, 검도, 하키, 펜싱, 태권도 등 19개 종목에서 6,000여 명의 어린 선수들이 참가하여 서로의 기량을 겨뤘다.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선수들은 각 경기단체에 선수등록을 마친 전국의 초등학교 5∼6학년과 중학교 1,2,3학년 학생으로, 초등학교부는 만 12세 이하, 중학교부는 만 15세 이하였다.

제2회 대회에는 재일동포선수단이 처음으로 참가했으며, 이 대회에서 종합우승한 충북은 1979년까지 7연승을 거두기도 했다. 1980년 제9회 대회에서는 시·도간의 지나친 경쟁을 막기 위해 종합채점제가 폐지되고 입장상도 폐지되었다가 1982년에는 기록향상을 위해 종합채점제가 다시 실시되었다. 1986년에는 예산 문제 등으로 전국에서 분산 개최되었고, 식전행사·성화 봉송 등 부대행사도 생략되었다. 1988년에는 전국체육대회, 종목별 전국대회와 통합하여 함께 열리기도 했다.

전국소년체육대회는 우수한 선수를 조기 발굴 육성하고 학교 체육을 활성화한다는 순기능이 많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개최 시·도의 재정 부담, 과열 경쟁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로 인해 전국 규모로 치러지던 전국소년체육대회는 1989년 잠시 중단되고, 대신 지역별로 체육경기가 소규모로 개최되었다. 그러나 소년체전의 폐지로 인한 학교체육 활동의 위축, 우수 선수의 조기 발굴의 어려움 등이 지적되면서 1992년 다시 전국규모의 대회로 열렸다. 1992년 제21회 대회는 재정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서울, 대구, 광주 등에서 분산 개최되었으며, 자라나는 선수들이 지나친 승부 의식을 갖지 않게 한다는 취지에서 시·도별 종합 채점과 메달 집계를 하지 않고 개인 시상식만 하였다.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회이다 보니 1993년 서울과 경기에서 열린 제22회 대회는 수업 결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말을 포함하여 대회가 진행되었고, 1998년 경남에서 열린 제27회 대회에서는 IOC 어린이 스포츠미술대회와 더불어 다양한 청소년 문화예술 행사도 함께 실시되었다. 2010년 대전에서 열린 제39회 대회부터는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하계방학 기간 중에 개최되었다. 2016년 열린 제45회 전국소년체육대회는 종합시상제도가 없기 때문에 개회식과 폐회식 행사를 별도로 진행하지 않았으며, 학생선수들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각종 행사 없이 평일 개최를 최소화했다. 대회종목은 제1회 때 육상, 수영, 축구, 야구, 배구, 농구 등 19개였는데, 2016년 제45회 대회에서는 무려 36개 종목으로 늘어났다. 참가인원도 1회에서 10회까지는 연 6,000∼7,000여 명이었으나, 15회 대회에서는 1만 1,837명, 16회 대회에서는 1만 2,928명이 참가하여 전국체육대회와 버금가는 참가인원으로 경기인구의 저변확대를 꾀하였다. 재일동포 선수단은 제2, 3, 8, 12회 대회에 참가했으며, 재미동포 선수단은 제8회와 제9회 대회에 참가하였다.

제2회 대회 때에 처음 등장한 성화는 이순신 장군의 충절이 깃든 아산 현충사에서 채화되었고, 제3회 대회에서는 서울 남산에서 채화하였다. 제4회 대회부터는 애국충절과 협동정신을 통하여 나라를 통일한 화랑들의 얼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옛 신라 화랑들의 본고장인 경주 화랑의 집에서 채화하였다. 그러나 최근 열리고 있는 전국소년체육대회는 개·폐회식은 물론 성화 봉송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경기만 치러지고 있다.

제8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성화 채화식 썸네일 이미지
제8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성화 채화식(1979)
제9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전경 썸네일 이미지
제9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전경(1980)
제14회 전국소년체전 개막식 썸네일 이미지
제14회 전국소년체전 개막식(1985)

미래 스포츠 스타의 산실 소년체육대회

전국소년체육대회가 낳은 대표적인 선수는 농구의 박찬숙, 수영의 최윤희, 역도의 전병관이다. 박찬숙은 1974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제3회 대회 개막식에서 선수대표로 선서를 했다. 당시 숭의여중 3학년이었던 박찬숙은 그때 키가 이미 180cm에 이르고 있었으며, 이 대회에서 발군의 경기력을 뽐내 여중부 농구 결승에서 전남 수피아 여중을 45-30으로 가볍게 물리치고 우승했다. 훗날 여자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아시아경기대회 3관왕에 오르며 ‘아시아의 인어’라 불리게 되는 최윤희 선수는 1979년 5월 충청북도에서 열린 제8회 대회 수영 초등부 배영 여자 100m와 200m에서 2관왕에 올랐다. 이에 앞서 1976년 6월 서울에서 개최된 5회 대회 수영 초등부 배영 여자 100m와 200m에서는 최윤희의 언니 최윤정이 우승을 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56kg급에서 한국 역도의 숙원이던 금메달을 딴 전병관은 1983년 5월 전라북도에서 개최된 제12회 대회 중학부 48kg급에서 우승하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수영 남자 400m 금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 400m 은메달의 주인공 박태환도 2004년 전라북도에서 열린 제33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최우수선수 출신이다. 이들 선수 외에도 양궁의 양창훈 등 수많은 우수 선수들이 전국소년체육대회를 통해 미래의 스포츠 스타로서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 등에서 메달리스트로 거듭나는 꿈을 키우고 있다.

(집필자 : 황은주)

참고자료

  • facebook
  • twitter
  • print

주제목록 보기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