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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항일만세운동으로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3.1 운동과 정신을 기념하는 3.1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부터 국경일로 지정하여 기념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항일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 3.1운동 당시 사진(1960, CET0045991(2-1)) 참고 이미지
  • 3.1운동 당시 사진(1960)
  • 3.1운동 당시 광경(1968, CET0046064(3-1)) 참고 이미지
  • 3.1운동 당시 광경(1968)

일반적으로 3.1절 기념행사는 정부요인 등이 참석하는 공식행사와 순국선열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결성된 광복회 회원이 주축이 되는 추념행사로 구분된다. 추념식은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거행되는데 이곳이 1919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3.1운동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하였으나 일제의 무력진입을 염려하여 인사동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시각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과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종로, 서울역, 정동, 이화학당, 서대문 등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는데, 이것이 전국으로 확대된 3.1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만세운동은 해외로도 확대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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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제53호] 제36회 3.1절 경축(1955)

3.1 운동은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써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이를 계기로 같은 해 4월 11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독립운동을 체계화, 조직화, 활성화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선언일’ 기념으로 민족의 힘을 모으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부터 국무회의와 임시의정원의 논의를 거쳐 1920년 3.1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국경일 명칭은 ‘독립선언일’로 정하였다. 다음 해에 3.1 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이 상해 올림픽대극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는데, 국무원와 임시의정원 의원 등이 참석한 기념식과 상해민단이 주최한 대축하식, 자동차 만세시위 운동으로 진행되었다. 당일 이른 아침부터 상해 곳곳의 한인들은 상점에 태극기를 걸어 ‘독립기념일’을 기념하고 축하하였다.

이후에도 3월 1일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자들과 광복을 열망하는 온 민족의 가장 큰 기념일이었으며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미주 등 해외동포들도 다양한 행사를 통해 이 날을 기념하며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였다. ‘독립선언일’, ‘3.1절’이라 부르며 기미년 3월 1일을 기념하는 전통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3월 1일, 대한민국의 국경일 3.1절이 되다

광복 후 처음으로 맞이한 3월 1일은 미군정 치하였다. 미군정은 1946년 2월 21일 군정법률 제2호 「경축일 공포의 관한 건」을 공포하여 이날을 경축일로 지정하였다. 이 경축일은 일본의 압박과 지배를 기쁘게 벗어나 대한독립을 최초로 선언한 제17회 기념일로써 대한독립의 대의를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애국열사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으로 의미를 제한하였다. 또, 행정명령 13호 「3.1일(독립일) 기념축하식 거행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지정된 장소 이외의 축하식을 제한함으로써 광복이후 첫 3.1절 기념행사의 규모를 축소시켰다.

정부수립 이후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에서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이 4대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3.1절은 임시정부로부터 내려온 국경일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3월1일(독립일) 기념축하식 거행에 관한 건(1948, BA0155506(16-1)) 참고이미지
3월1일(독립일) 기념축하식 거행에 관한 건(1948)

노래로 기억하는 그날, ‘독립군가’에서 ‘3.1절 노래’로

  • 제11회 민족대표33인중 고인 합동 추념식 광경(1962, CET0071387(1-1)) 참고 이미지
  • 제11회 민족대표33인중 고인 합동 추념식 광경(1962)
  • 제60주년 3.1절 기념식(1979, CET0069023(3-1)) 참고 이미지
  • 제60주년 3.1절 기념식(1979)

1920년 3월 4일자 《독립신문》에는 첫 번째 상해의 3.1절 축하식 행사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임시정부 및 의정원의 축하식은 ‘애국가 제창, 이총리의 식사, 손의장의 축사, 학생일동의 독립군가(“누가나가 싸호려난가”) 합창, 대한민국 만세삼창’으로 진행되었다. 3.1절 축하노래로 ‘독립군가’가 불려졌다.

“나아가세 독립군아 어서나가세
기다리던 독립전쟁 도라왓다네
이때를 기다리고 10년 동안에 갈앗던 날낸칼을 시험할 날이
나아가세 대한민국독립군사야
자유독립 광복할 날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기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세 낙엽 갓히 슬어지리라....."

당시 《독립신문》에 수록된 독립군가의 가사이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전쟁’을 불사한 결연한 의지가 읽힌다.

1923년 3월 1일 상해의 3.1절을 생생히 기록한 글에는 설날보다 기쁜 날로 모든 독립운동가를 만나는 날이었다고 한다. 이때 ‘3.1절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앞서 부른 독립군가와 사뭇 다른 느낌이다.

“참 기쁘고나 삼일하로 독립의 빛이 빛웠고나 금수강산이 새로웠고 2천만동포가 기뻐한다
(후렴) 만세만세만세만세만세 만-세 우리나라 우리동포 만-세만만세 만세만만만-세 대한의 독립이 만만세라!"

<상해에서 지낸 삼일절>, 《경향신문》, 1949.3.1.

이 노래 가사에는 3.1 운동 이후 점점 교묘해지는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맞서 기미년 삼월일일의 감동을 기억하면서 독립운동의 결속을 바랐던 애국지사들의 마음이 녹아있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3.1절 노래는 1946년 위당 정인보 선생이 작사하고, 박태현 선생이 작곡한 창작곡이다. 아마도 미군정시기 3.1절 기념축하식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기리 빛내자

1950년 2월 25일 총무처 장관은 이 ‘3.1절 노래’를 입법, 사법, 행정부에 송부하였는데 이를 통해 3.1절 공식기념행사 노래로 지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일절 경축식 행사에 관한 건(1950, BA0135052(27-1)) 참고이미지
삼일절 경축식 행사에 관한 건(1950)

당초 총무처는 3.1절 노래 등 국경일 제정을 기념하여 국경일 노래 가사를 현상공모하였는데, 공식 국경일 행사에서 통일적인 노래가 불려져야 한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기존의 정인보 선생 작사의 3.1절 노래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동안 3월 1일은 국내외에서 한국인이라면 이념을 초월하여 한마음으로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던 축제의 날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이 날은 온 국민이 기뻐하고 즐겼던 기념일이었는데, 점점 정부공식행사로만 축소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2019년은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계기로 인류평등과 민족자존을 선포하고 자유, 평화를 갈망했던 3.1 운동의 정신을 기념하며 온 국민이 참여하는 축제일로 자리매김 되길 희망해 본다.

(집필자 : 조정미)

참고자료

  • 법령정보센터 (http://www.law.go.kr)
  • 네이버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
  •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가사모집〉, 경향신문, 1949.11.09.
  • 〈삼일절의 노래〉, 동아일보, 1950.02.26.
  • 조덕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경일 제정과 ‘건국기원절’ 기념〉《한국근현대사 연구》82, 한국근현대사학회, 2017
  • 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3・1절 기념과 3・1 운동 인식〉《한국독립운동사연구》5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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