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개항했다. 조선을 찾는 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이 이용할 호텔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880년대 중반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大佛)호텔’을 인천 중앙동에 세웠다. 대불호텔 건너편에는 중국인 이태가 ‘스튜어드호텔’을 열었는데, 영국인 화가 새비지는 저술에서 1890년 인천에는 이미 3개의 서양식 호텔이 있었다고 하고 있어 스튜어드호텔도 대불호텔과 비슷한 시기에 생긴 듯하다. 서울에도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 생겼는데, 1902년 프랑스계 독일 여성인 앙투아네트 손탁이 정동 경운궁 건너편에 지은 ‘손탁호텔’이다. 뛰어난 사교술로 왕비는 물론 고종과 고관대작, 서양인들과도 친밀하게 지냈던 손탁의 호텔은 각국의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졌던 현장이었다. 1904년 3월과 1905년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이용했으며, 러일전쟁 시에는 후에 영국의 수상이 된 처칠이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기도 하였다.
1912년과 1914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주관이 되어 만철회사가 건설한 철도호텔이 부산과 신의주 그리고 서울에서 각각 영업을 개시하였고, 1920년대에는 철도국 직영호텔이 되었다. 이 중 서울에 세워진 ‘조선철도호텔’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호텔’이다. 1915년 4월 조선호텔에서는 ‘조선기자대회’가 열렸는데, 이는 우리나라 호텔에서 최초로 열린 대규모 단체 회합이었다. 조선호텔은 ‘최초’의 아이스크림, 엘리베이터, 댄스파티 등을 선보이며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조선호텔과 더불어 최고의 호텔로 인정받는 롯데호텔의 뿌리는 1938년 일본인 노구치가 소공동에 세운 ‘반도호텔’이다. 4층의 조선호텔보다 2배가 높은 지상 8층의 반도호텔은 당시 최대 규모였다. 광복 이후 주한 미군사령부의 지휘본부로 사용되기도 했고 이승만 정권기에는 주요 정치인들이 많이 이용하여 ‘호텔정치’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1973년 롯데그룹이 인수하여 새롭게 건물을 짓고 ‘롯데호텔서울’로 이름을 바꾸었다.
1963년 4월 서울 광진구 아차산 기슭에 지어진 워커힐호텔은 서울시내 호텔 중에 가장 경관이 좋은 호텔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 한강을 내려다보며 자리 잡은 워커힐호텔은 봄꽃 축제와 야외수영장, 아이스링크 등 계절마다 열리는 테마축제뿐만 아니라 매년 새롭게 선보이는 ‘워커힐쇼’도 유명하다. 1977년 쉐라톤과 프랜차이즈체인 계약을 체결하였고, 2002년 11월에는 쉐라톤 워커힐에서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로 브랜드가 승격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는「관광진흥사업법」을 제정․공포하면서 외화를 벌 수 있는 관광사업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하였다. 1963년 교통부 관광과가 관광국으로 승격되고,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인한 일본인 관광객의 유입으로 기존의 호텔로는 부족하였다. 이후 1975년을 전후하여 대규모 관광단지가 조성되었고. 1982년 야간통행금지 해제와 각종 국제대회 유치, 그리고 1992년 중국과의 수교로 대규모의 중국 관광객이 몰려오면서 호텔은 호황기를 맞았다. 1997년 외환위기로 고비를 겪기도 했지만, 새롭게 불어온 한류열풍으로 많은 외국관광객이 한국을 방문하여 호텔을 이용하고 있다.
2000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관광객 500만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의 호텔 숙박, 쇼핑 등으로 68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올렸다. 2010년 말 한국관광호텔업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특1등급 호텔의 객실수는 2만 2,600여개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