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이라 불리던 6.6㎡ 남짓한 공간. 누가 들고 나는지 모르는 그곳에 고단한 몸을 누이고 공장에서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월급봉투에는 이것저것 떼고 74,166원의 액수가 찍혀 있었다. 1980년대 초 구로공단 여공이 받은 월급봉투다. 그마저도 고향집에 보내고 얄팍해진 주머니로 구로구 가리봉 오거리 일명 ‘가리베가스’라 불리는 곳에서 양품점이나 음악다방을 찾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공순이라는 비웃음을 감내하며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상경한 10대 후반의 누이들은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 역군들이었다. 그들이 몸담고 일했던 구로공단은 1970년대 우리나라 수출 산업의 선두 주자이자 산업 공단의 중심지로서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일제의 식민지 침탈, 6.25전쟁 등으로 우리나라의 산업 설비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미국의 원조 없이는 국민 경제를 지탱해 나갈 수 없었으며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자립 경제의 기반 구축을 기본 목표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목표는 농업생산력 증대, 기간산업 확충과 사회간접자본 충족, 수출증대 등이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정부는 1964년 9월 14일 수출산업에 사용하는 공업단지를 조성·운영하여 수출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수출공업단지개발조성법」을 제정하는 등 행정적 지원책을 총동원하였다. 이러한 정부 정책에 힘입어 1967년 지금의 구로구 구로 3동 지역에 우리나라 최초의 내륙 공업 단지인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1967년 4월 1일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이날 오전 11시 구로동 공업단지 내 한국 수출산업공단본부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각료 및 산업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출산업공업단지 준공식이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축사에서 “허허벌판을 불도저로 밀어붙인다고 수출 공장이 되겠냐며 의심한 사람도 많았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 정부는 이 단지를 25개 공장이 더 들어설 수 있도록 확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구로공단은 탄생하였으며 정식 명칭은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제1단지였다.
구로지역은 여러 면에서 입지 조건이 뛰어났다. 자연적으로 점토질의 구릉과 평탄지로 공단 조성에 매우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영등포에서 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국도가 인접해 있고, 영등포역과는 약 5㎞, 인천항까지는 약 25㎞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원료나 부자재 운반 수송에 용이한 지리적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안양천과 도림천이 인접해 있어 공업용 용수 공급을 위한 취수장 설치가 용이했으며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까닭에 조성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도 어렵지 않았다. 유리한 입지 조건 때문에 구로공단은 조성되자마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제1단지 공사가 완공돼 기업체유치, 공장건설, 수출 등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자 공단에 입주하겠다는 희망 업체들이 늘어났다. 이에 1단지 인접 지역인 구로구 가리봉동 일대 약 360,000㎡에 제2단지를 새로 조성하였고 다시 1970년 5월 현재의 구로구 가리봉동과 경기도 철산리 일대에 약 1,000,000㎡에 제3단지를 조성하면서 한국 최대의 공업 단지가 되었다. 구로공단에 입주한 업체들로는 의류, 봉제제품이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은 전자, 음향기기, 전기, 광학기기 등의 순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품들은 산업단지 안에 있는 수출의 다리를 건너 해외로 팔려나갔다. 수출의 다리는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에 있는 고가도로로, 일대가 구로공단으로 불리던 시절에 붙여진 이름이다.
1966년 12월 동남전기가 공단에 입주한 업체 중 최초로 139,893달러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티비 수상기를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구로공단은 1971년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이후, 1980년에는 수출 18.7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1977년 국가수출 100억 달러 달성 시 구로공단에서만 11억 달러의 수출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1970년대 중반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섬유·봉제 산업과 같은 경공업 대신 전기·전자·기계·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 제품이 공단의 주력 품목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구로공단은 국가 수출의 10%를 점유할 만큼 우리나라 수출의 전진 기지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했다.
구로공단이 활성화되면서 입주 기업의 수가 증대하자 제품 생산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수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1978년 말 구로공단에 근무하는 전체 근로자의 수가 11만 4천 여 명에 이르렀는데, 1967년 말 공단 가동 초기 2,460명에 불과했던 고용 규모가 10년 동안 43배나 증가한 것이다. 막강한 노동력 덕분에 공단 사업체의 표어 가운데는 ‘노동력 70%, 기계 30%'라는 말까지 있었다. 구로공단의 주력 산업이 노동 집약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데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시기 공단에 고용된 근로자들은 대부분 농촌에서 상경한 젊은이들로 채워졌다. 이에 공단 측은 늘어나는 노동력 수용을 충당하고 노사 관계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산업체 부설 학교를 세워 배우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을 충족시켜 주었다. 특히, 공단 측은 미혼 여성 근로자들을 위해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기숙사나 생활관을 짓도록 입주 업체들에게 독려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구로공단은 짧은 시간 동안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근로자들의 주거 생활을 충분하게 뒷받침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른바 ’벌집‘이라고 하는 근로자들이 밀집 거주하는 주거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구로공단은 대학생들의 의식화 현장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운동권 학생들은 위장 취업을 통해 스스로 기계공이 되어 노동운동의 불을 지피기도 했다.
1988년 40억 달러를 넘겼던 구로공단의 수출 규모는 1999년 15억 달러로 급감했다. 이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세계 경제의 침체와 선진국의 신무역보호주의에 따른 수출 부진, 중화학 부문에 대한 중복 과잉 투자로 인해서였다. 구로공단은 시장 개방의 파고와 함께 원화 절상, 임금 상승, 노동력 수급의 어려움, 기술개발 부진 등으로 인해 수출 침체와 고용 감소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더불어 공장 시설을 확장할 수 없는 공단 부지 문제와 물류비용 증가 등으로 구로공단 입주 업체들은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이렇듯, 국제 경쟁력이 약화됨에 따라 공단 내 많은 입주 업체들은 임금이 싸고 노동력 수급이 원활한 동남아시아, 중국, 남미 등 해외에 현지 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로서 1995년에는 구로공단의 노동자 수가 총 4만 2천 명까지 줄어들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수출의 견인차이자 전통 제조업의 생산 기지로서 막강한 역할을 해왔던 구로공단의 명성을 점차 빛바래게 했다.
정부는 1996년 6월 「공업 배치 및 공장 설립법 시행령」 개정안을 확정하였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구로공단 등 인구 과밀 억제 지역에 위치한 공단을 첨단 산업단지로 개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각종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는 다양한 세제 지원을 통해서 입주 업체들의 부담을 덜어 주는 등 첨단 산업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통해서 재래식 공단의 재개발 및 첨단 업종의 공장 신·증설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 하에 구로공단은 산업구조 개편을 통해서 첨단 산업을 주도하는 도시형 산업 단지로의 전환을 모색하였다. 2000년 9월 구로공단이라는 명칭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었다. 또한, 정부와 구로구의 각종 지원이 진행되면서 대기업의 연구개발시설, 지식산업, 정보통신, 소프트웨어 기업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몰려들었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는 2015년 기준으로 9,726개사가 입주해 있는데, 도시형 첨단 IT업종인 디지털컨텐츠, 소프트웨어(SW), 게임, 애니메이션 등의 지식기반산업 등이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16만 명의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다. 아파트형 공장인 지식산업센터는 2015년 말 기준으로 총 104개소가 준공됐으며 이는 산업단지 면적의 2.5배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라는 새 옷을 갈아입은 구로공단의 부활은 아직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