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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국새를 고래가 삼켜버렸다? 전대미문의 고래 국새 강탈 사건.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을까? 이는 조선왕조를 연 이성계가 명나라에 국새를 요청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만들어진 영화 「해적:바다로 간 산적」에 나온 내용이다.

영화 「해적:바다로 간 산적」의 모티브가 된 조선의 국새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 명나라에 새로운 국새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로서는 중국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했고, 그 첫 번째 절차가 국새를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나라는 국새를 바로 내주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이 위협적인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국새를 요청하면서 발송한 표전문(表箋文, 황제에게 바치는 글)이 겉으로는 예의바르나 살펴보면 매우 무례하고 조롱조였다는 이유로, 불경스러운 문구가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국새 발급을 계속해서 거절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국새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었다. 명나라에서 보내준 국새는 외교문서에 날인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명나라는 자신들이 보내준 국새가 찍힌 외교문서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이 신하를 관직에 임명하거나 왕명을 발표할 때 쓰는 국새는 따로 있었다. 이 국새는 조선에서 별도로 만들었기 때문에 명나라에서 국새를 보내지 않았어도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명나라와의 외교문제 뿐이었다.

명나라는 이방원이 조선의 세 번째 왕이 되고 난 1403년에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고 쓰인 국새를 그제야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방원은 명나라가 보내준 국새를 사용한 최초의 조선 왕이 되었다. 이때 받은 국새를 ‘대보(大寶)’라고 하여 1636년까지 중국과 관련된 외교문서에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영조 때는 국새의 종류가 가장 많았다. 쓰임새에 따라 각기 다른 국새를 만들었는데 중국에 보낼 문서에 사용했던 ‘대보(大寶)’, 임금의 명이 담겨 있는 문서에 쓰였던 ‘시명지보((施命之寶)’, 서적 반포에 사용되었던 ‘선사지기(宣賜之記)’와 ‘동문지보(同文之寶)’, 통신 문서에 찍었던 ‘이덕보(以德寶)’ 등 여러 국새를 사용하였다.

자주독립의 꿈, 대한제국의 국새

국권을 상징하는 인장, 즉 나라도장의 이름은 새(璽), 보(寶), 어보(御寶), 어새(御璽), 옥새(玉璽), 국새(國璽) 등으로 불린다. 여기서 새(璽), 보(寶)는 나라의 인장(印章)을 뜻하는 것이고, 어보(御寶), 어새(御璽)는 시호, 존호 등을 새긴 왕실의 인장을 말한다. 옥새(玉璽)는 재질이 옥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금으로 만든 것은 금보(金寶)라 한다.

조선의 국새에는 거북이 새겨져 있었다. 거북 모양은 중국의 황제가 변방의 제후들에게 내리던 국새의 형태를 그대로 본 딴 것으로 거북은 ‘복종’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거북의 머리가 중국의 힘이 어떤지에 따라 치켜드는 정도에 차이가 있었다. 즉, 중국의 힘이 커졌을 때는 머리가 수그러들고, 중국의 힘이 약해져 조선에서 주체성을 찾으려 할 때는 거북의 머리가 올라갔다고 한다.

국가인장 썸네일 이미지
국가인장(1958)
국가인장 썸네일 이미지
국가인장(1958)
옥새 국새 썸네일 이미지
옥새 국새(1959)

서구 열강으로 인해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던 조선을 구하기 위해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다. 이때 고종은 국새에 있던 거북이만 보면 싫증이 난다며 황제를 상징하는 용으로 바꿔 국새를 새로 만들었다. 이로서 고종은 중국과의 사대 관계가 끝났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자주 조선의 권리와 정통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려 했다. 그런데 이즈음 고종에게는 또 다른 국새가 있었다. 그것은 다른 황실어보나 국새보다는 크기가 작은 것으로 ‘황제어새(皇帝御璽)’라고 불린다. 황제어새의 사용처는 이탈리아와 러시아에 지지를 요청하는 친서나 1909년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한 비밀 자금을 인출하기 위해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에게 준 친서 등에 사용되었다. 즉, 황제어새는 고종이 몰래 갖고 있다가 비밀외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지원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에서는 고종황제가 사용하던 황제어새를 보물 제1618호로 지정했다.

5대 국새를 만나러 가다.

국새는 말 그대로 ‘국가의 도장’인 만큼 나라의 중요문서에서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헌법개정공포문의 전문, 대통령 명의의 비준서, 5급 이상 국가공무원의 임명장, 훈장증 등 연간 1만 2천장 정도의 문서에 국새가 찍힌다.

국새규정 썸네일 이미지
국새규정(1949)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19층. 국무회의실 출입문 한쪽에 커다란 장금장치를 달아놓은 문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3평 남짓한 작은 방에 ‘대한민국 국새’라고 씌어 있는 금고가 있다. 이중금고일 뿐만 아니라 소방시설, 도난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갖춰져 있다. 그곳에 대한민국 5대 국새가 있다. 광복 후 모두 다섯 번 국새를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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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 규정(1962)

제1대 국새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듬해인 1949년 5월 완성되었다. 제1대 국새는 사방 약 6㎝의 정방형 도장 형태에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라는 한자가 새겨진 국새로 지금까지 제작된 국새 중에 가장 크기가 작았다. 다만 제1대 국새는 안타깝게도 분실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제2대 국새는 한글을 새긴 것으로, 1963년부터 1999년까지 36년이라는 최장수 사용기록을 갖고 있다. 한글 전서체로 ‘대한민국’이라 새겨져 있고 거북이 모양을 한 손잡이로 고려와 조선시대의 전통 국새 모양을 계승했다. 두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함께 한 제3대 국새는 손잡이에 균열이 생기면서 10년도 채 사용하지 못하고 폐기되었으며, 제4대 국새는 국새 제작자의 사기 행각이 밝혀져 2년 9개월 만에 폐기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2011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제5대 국새는 금, 은, 구리, 아연과 함께 강도를 높이고 균열을 막기 위해 희귀 금속인 이리듐도 사용하였다. 크기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4cm 무게는 3.38kg으로 역대 국새 중에서 가장 무겁다. 국새의 글자는 ‘대한민국’을 훈민정음체로 새겼으며, 국새의 손잡이에는 봉황이 앉아 있다. 이 국새를 만들기 위해 사자관, 화원, 보문각장, 호갑장 등 모두 54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새로운 국새 제작계획 썸네일 이미지
새로운 국새 제작계획(1998)

도장이되 도장 이상의 의미를 지닌 국새. 국새는 국가의 권리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한 나라의 흥망성쇠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