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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영원하다 미스코리아

“누가 ‘진’이 될 것 같으세요?”
미스코리아 진을 가르는 최종 후보 두 명만 남게 되면, 진행자는 늘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과거의 후보자들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대답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저 일 것 같은데요?”, “저였으면 좋겠네요.” 등등의 조금은 당돌한 대답들을 하기 시작했다.

미의 사절단이라 불리는 ‘미스코리아’ 대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57년이었다.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행사로 미국에서 열리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석할 한국의 대표 미인을 뽑을 목적이었다. 1957년 5월 14일 제1차 선발전이 치러졌다.

미스코리아 선발대 참고 이미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1957)
1958년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참고 이미지
1958년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1957)
미스코리아 출발 참고 이미지
미스코리아 출발(1957)
이승만 대통령 내외 미스코리아 접견 참고 이미지
이승만 대통령 내외 미스코리아 접견
(1957)

"십사일 아침 10시 시내 공보실 공보관에서는 자기 취미에 맞는 옷차림으로 등장한 '미스코리아' 예선이 비공개리에 막을 열었다."(「서로가 자신(自信) 간직 미스코리아 제일차 선발(第一次 選拔」, 경향신문 1957년 5월 15일자 기사)

그로부터 4일 뒤, 결선이 진행되었다.

"미스코리아" 선발의 결선심사를 19일 상오 0시부터 '시립극장‘에서 공개리에 시행하리라고 하는데 앞서 예선을 파스한 후보자는 칠 명이라고 한다.“(「19일(日) ‘미스코리아’ 결심(結審)」, 동아일보 1957년 5월 18일자 기사)

초대 미스코리아 진에 박현옥(23, 서울)이 선정되었고, 상금 30만 환, 양단 치마저고리 한 감, 고급 양복감, 목걸이 한 점, 치마저고리 한 감, 은수저 한 벌 등 푸짐한 상품을 받았다. 첫 회부터 결선에서는 수영복을 입고 몸매 심사가 이뤄졌는데, 보수적인 유교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던 당시엔 큰 ‘충격’이었다. 정숙한 여성을 강조하던 시대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행사였지만, 반응은 예상외로 폭발적이었으며 대회장은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미스코리아 시가행진 참고 이미지
미스코리아 시가행진(1958)
1960년 미스코리아 및 미스월드 한국대표 시가행진 참고 이미지
1960년 미스코리아 및 미스월드 한국대표
시가행진(1960)
1962년 미스코리아진선미 선발대회 참고 이미지
1962년 미스코리아진선미 선발대회
(1961)

다음 해인 1958년 제2회 대회에서는 결선 진출자가 15명으로 늘어났고, 이후 전국 15개 시·도에서 지역 예선을 거친 참가자들과 해외지역 예선을 거친 참가자만이 본선에 진출할 수 있을 정도로 대회 규모 역시 커졌다. 1964년에는 리틀 미스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예쁜 어린이를 선발하기도 했고, 1965년에는 군부대에서도 미스 여군을 선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9년 미스코리아 진이 기혼자로 밝혀지면서 자격이 상실되기도 했으며, 1972년에는 우리나라 대표로 아시아 미인대회에 참가했다 돌아오던 미스코리아 미가 보석과 화장품류를 밀수해 오다 적발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성을 상품화시키며 미를 획일화시킨다는 미인대회의 문제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75년 대한 YWCA연합회가 ‘미인대회는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갖게 되면서 이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하지만 미스코리아 대회의 인기는 갈수록 뜨거워져 1976년에는 급기야 방송국에서 전야제를 따로 편성해 미스코리아 본선에 출전한 후보들을 소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77년 에베레스트로 향하는 우리나라 원정대에게 화환을 걸어주며 국민의 격려와 응원을 표현하는 것도 미스코리아의 역할이었고, 미스코리아들이 코미디 프로그램에 특별 출연해 코믹 연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큰 화제를 모았다. 1979년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이었던 손정은이 영화「광염 소나타」에 캐스팅되었고, 1977년도 미스코리아 진 김성희가 1980년에 탤런트 데뷔를 선언하면서 미스코리아는 곧 연예계 진출이라는 공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64년 미스코리아 진.선.미선발대회 어린이참가자 참고 이미지
1964년 미스코리아 진.선.미선발대회 어린이
참가자(1964)
`88 서울올림픽대회 문화예술축전 미스코리아 퍼레이드 참고 이미지
`88 서울올림픽대회 문화예술축전 미스코리아
퍼레이드(1988)
1989년 미스코리아선발대회 장기자랑 참고 이미지
1989년 미스코리아선발대회 장기자랑
(1989)

하지만, 1980년 당시 우리나라의 시대 분위기는 어두웠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지만, 이와는 상관없이 치러지는 ‘미의 축제’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게 미스코리아 대회의 당위성에 대한 논란은 끝없이 제기되어 왔다. 1999년엔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도 열렸다. 새로운 여성미의 기준을 제시하겠다는 의도였는데, 10살 꼬마부터 위안부 할머니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다.

하지만 미스코리아 대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건 대회 자체의 문제들이 하나둘 드러나면서부터였다. 1993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주최사 사업본부장이 지난 4년간 참가자의 부모와 미용실 업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고 선발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른 사건이 밝혀지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미인대회가 그 신뢰를 잃었다. 1998년에는 1차 예심에서 심사 점수에 오류가 생겨 심사결과를 뒤집고 재심사를 거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아름다움은 예술의 궁극적 원리이며 최고의 목적이라 말했다. 과거 미스코리아 대회가 어두운 시대적 상황을 잠시나마 잊게 할 아름다움, 우리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면 미스코리아 대회에 대한 관심과 반응이 다소 사그라진 지금 우리는 이미 그 판타지에서 깨어나 현실의 아름다움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미스코리아 대회는 영원할 것이다. 어디에서든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찾는 것, 그것이 예술의 목적이자 우리의 본능일 테니까 말이다.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경향신문, 「異彩(이채)의 美人行進(미인행진) 「미스·코리아」決選大會(결선대회)」, 1958.5.25.
  • 동아일보, 「미국 간 리틀 미스 코리아」, 1964.7.22.
  • 동아일보, 「미스 여군탄생」, 1965.5.15.
  • 동아일보, 「에베레스트遠征隊(원정대) 凱旋(개선)」, 1977.10.6.
  • 동아일보, 「영화 광염 소나타 출연한 78 미스코리아 손정은 양」, 1979.7.7.
  • 동아일보, 「코메디언으로 나온 裴素英(배소영)양」, 1977.6.6.
  • 한겨레, 「미스코리아 선발 부정」, 199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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