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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UN)은 한국에게 무엇이었나? 국제연합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엔(UN)이라는 말을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언제쯤부터였을까. 아마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부터였을 것이다. 물론 유엔은 그 전에 설립되었고 한국에 대한 유엔의 활동도 이미 전개되고 있었지만, 정작 우리는 UN이란 영어글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시대에 느닷없이 전쟁의 시련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 통에 그들이 나서서 우리를 도와 나라를 건져주었다고 생각하면서부터는 너도 나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유엔이란 말을 거의 입에 달고 다니다시피 했다. 오죽하면 ‘유엔극장’ ‘유엔시장’ ‘유엔 사모님’ ‘유엔점퍼’까지 나왔겠는가. 심지어 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물건이나 외국산 제품들은 그냥 쉽게 모두 유엔이라는 글자만 붙이면 통하는 것으로 알았을 정도였다.

당시 우리는 유엔의 회원국도 아니면서 유엔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를 마치 하나의 사회현상처럼 받아들이고 살았다. 우리식 이름인 ‘국제연합’은 아예 생각지도 않고 그저 유엔, 유엔 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이 유엔의 사무총장까지 하고 있다. 세상 참 많이 달라지고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 국제사회에서의 우리나라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유엔에서 제공하는 탈지분유와 밀가루를 얻어먹고, 그들이 원조한 남루한 옷들을 얻어 입으면서 혹독한 가난과 전쟁의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은 때가 불과 몇 십 년 전인데, 우리는 지금 세계 10대 교역국에 들 정도로 경제대국이 되었다.

6.25전쟁 때 피난 다니면서 받은 구호물자 부대자루에 선명하게 찍힌 ‘UN'이란 두 글자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데, 어느 세월에 우리는 유엔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입장이 바뀌어 있기도 하다. 그때 우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유엔 비회원국이었는데, 어느새 어엿한 유엔의 회원국이 되어 국제무대에 영향을 주는 나라로 바뀌었다. 그런 유엔은 과거 6.25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우리나라에 유엔군 파병을 결의했고, 한국군을 유엔군에 편입시켜 전쟁을 치러낸 무척 고마운 국제기구였다.

유엔가입추진 전국위원회 결성식 썸네일 이미지
유엔가입추진 전국위원회 결성식(1956)

바로 그 유엔, 국제연합이란 기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10월 24일부터 회원국들이 채택한 헌장이 효력을 발생하면서 설립되었다. 세계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해 만든 국제기구 유엔은 처음 출발할 때 가입한 나라는 51개국이었지만, 2014년 현재의 회원국 수는 총 193개국으로 우리는 북한과 함께 1991년에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원래 유엔의 설립목적은 크게 네 가지로 되어 있었다. 세계의 평화와 안전유지, 우호관계 발전과 나라 사이의 다툼을 평화적으로 해결,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의 국제협력과 인권 및 기본적인 자유 신장을 위한 노력,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국의 행동을 조절하는 역할.

이러한 설립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주요기관으로는 유엔총회를 비롯해 안전보장이사회와 경제사회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가 있고, 그밖에 국제사법재판소와 유엔사무국, 그리고 전문기구로는 국제노동기구, 유엔식량농업기구,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 세계보건기구, 국제통화기금, 국제부흥개발은행(세계은행), 국제금융공사, 국제개발협회, 국제민간항공기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즉 유네스코 한국 지부는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53년 7월 초에 설치되었다.

유네스코 발족식 썸네일 이미지
유네스코 발족식(1954)
1956년도 유엔의 날 기념 꽃마차 썸네일 이미지
1956년도 유엔의 날 기념 꽃마차(1956)
국제연합 대표부 개관식 썸네일 이미지
국제연합 대표부 개관식(1974)

그리고 유엔본부는 미국의 뉴욕에 있지만 나머지 기구들이나 기관들은 네덜란드의 헤이그, 오스트리아의 빈, 스위스 제네바, 케냐 나이로비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 유엔에서 사용하는 공식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 중국어이다. 그러고 보면 이들 유엔의 기관이나 기구 가운데 어떤 형태로든 우리나라와 직간접으로 관련되지 않는 곳이 드물다.

얼핏 우리는 유엔하면 6.25전쟁과 함께 기억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유엔의 출범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은 결코 적지 않았다. 예컨대 한국정부의 수립과정에서 1947년에 벌써 우리나라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고, 1948년에는 유엔한국위원단 설치와 유엔임시위원단의 감시활동을 통해 우리나라에서의 첫 국회의원선거를 치렀다. 또한 그해 유엔총회에서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6.25전쟁이 터지자 안보리 결의를 거쳐 유엔군을 창설해 참전시켰고, 전쟁 내내 그 경과와 함께하면서 휴전협정을 이끌었으며, 휴전 후에도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전후(戰後)복구와 경제원조에 적극 나서주었다. 긴급구호기구의 활동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를 통한 개발원조와 현안문제가 생길 때마다 외자도입 주선, 유엔 한국재건단(UNKRA) 등 산하기구 활동 등으로 유엔은 꾸준히 우리나라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는 이렇듯 다각적인 유엔의 지원을 받았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며 스스로 내건 조국근대화와 산업화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우리나라는 자립갱생의 길로 들어섰다. 온 국민의 피땀 어린 노력과 근면성실의 의지와 정신개조를 디딤돌로 삼아,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가장 빠른 성공을 이루며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여기까지가 크든 작든 국제연합의 여러 가지 도움과 원조를 받으며 살았던 유엔 비회원국 시절 우리나라의 모습이었다.

노태우 대통령 유엔헌장 의무수락 선언서 서명 썸네일 이미지
노태우 대통령 유엔헌장 의무수락
선언서 서명(1991)
제16회 중봉충렬제 대한민국 유엔가입 축하기 입장 썸네일 이미지
제16회 중봉충렬제 대한민국 유엔가입
축하기 입장(1991)
노태우 대통령 유엔 연설 썸네일 이미지
노태우 대통령 유엔 연설(1992)

비약적인 발전으로 기력을 회복한 우리나라는 1991년 드디어 유엔의 회원국이 되었고,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유엔의 한 일원으로 우리들이 신세 진 것을 조금이라도 갚으려는 자세로 유엔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유엔평화유지군으로 군대를 파견해 세계평화유지활동에 나서고, 안보리 이사국에도 진출하고, 유엔총회 의장국으로도 활동하고, 유엔환경개발회의에도 참여했다. 이제 국제사회의 탈(脫) 냉전에 따라 유엔의 정치적 기능은 비교적 위축되고 있다지만, 그 대신 환경 등 많은 기능적 분야에서의 유엔에 대한 기대는 날이 갈수록 커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질서 관리자로서의 유엔의 기능과 역할은 오히려 그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과거와 같이 국제분쟁에 조정자로 나서는 역할 못지않게 국제사회의 환경과 인권, 전 인류가 행복을 추구하며 쾌적하게 사는 길을 모색하는데 유엔의 역량이 모아지고 있다.

국제연합 헌장 수락 및 공포 썸네일 이미지
국제연합 헌장 수락 및 공포(1991)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다음백과사전 (http://100.daum.net/)
  • 신동아, 『개항 100년 연표자료집』, 동아일보,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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