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메뉴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내용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서울의 역사와 함께 한 남산 남산

지금은 서울 곳곳에 가볼 만한 공원이나 명소가 많지만. 한때 남산은 서울 시민들이 멀리 나가지 않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나 가족 나들이,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애용되어온 남산이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역사 속 남산

남산은 조선시대 수도가 한양, 즉 서울이 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남산의 높이는 265.2m이고,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함께 옛 한양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원래는 목멱산(木覓山)·인경산(仁慶山)·마뫼 등으로 불렸는데, 주로 목멱산이라 하였다. 남산이라는 이름은 도읍지 한양의 남쪽에 있다하여 조선시대부터 통칭되어 온 것이다. 남산은 풍수지리설상 안산(案山) 겸 주작(朱雀)에 해당하는 중요하고 신성한 산으로 여겨져 정상에 국사당(國祀堂)을 두고 나라에서 봄·가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또 국방상 무슨 일이 생기면 각 지방에서 올린 봉화가 도착해 임금에게 전해지는 봉수대가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남산골 딸각발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산 자락에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살아 마을을 이루기도 했다. 이 지역은 현재 회현동과 남산동 일대로 남산의 남쪽 기슭에 해당한다. 남산골의 선비들은 북촌의 벼슬하는 양반들과는 달리 소박하고 가난하지만 학문에 열중했던 사람들이었다.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 또한 이 남산골에 사는 선비였다.

남산은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큰 변화를 겪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되기 직전 남산은 공원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당시 공원의 이름은 ‘한양공원(漢陽公園)’이었는데, 이 공원의 이름을 쓴 고종의 친필 비석이 현재도 남산에 남아있다. 재미있는 것은 공원 조성이 대한제국의 뜻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이다 보니 비석이 만들어질 당시 비석의 뒷면에는 공원을 만든 친일파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새겨졌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친일파의 자손들이 비석에 새겨진 조상 이름을 파내 지금 비석 뒤를 보면 이름을 새겼던 자리 곳곳이 훼손되어 있다.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이후 일제는 본격적으로 남산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애국가’ 2절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원래 남산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였으나,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혼을 빼앗기 위하여 소나무를 베어내고 아카시아 등의 잡목을 심어 산의 경관을 많이 해쳤다. 또 남산 중턱에 임진왜란 때 왜장들이 쳐들어와 성채를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자리에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을 조성하고, 공원 안에 일본인들의 참배용으로 경성신사를 만들었다. 남산 자락은 일본인 거주 밀집지역으로 개발되었다. 일제는 1925년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짓고 조선시대 제사를 지내오던 국사당을 헐어버렸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조선신궁에 참배할 것을 강압해 남산은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한과 증오가 서린 곳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와 남산

광복 후 남산은 또 한 번 변화를 겪는다. 일단 조선신궁은 광복 즉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남산공원이 조성되고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남산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해주는 사건의 현장이 되었다. 1956년 남산에는 살아 있는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는 거대 동상이 건립되었고, 1959년에는 그의 호를 딴 우남정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만에 이 동상과 정자는 1960년 4.19 직후 시민들의 손으로 철거되었다.

5.16 이후 남산은 또 한 차례 변화를 맞이하였다. 서울 시민의 휴식과 위락 장소로 남산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1962년 남산 케이블카가 설치되었고 1965년 남산도서관, 1968년에는 남산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1969년 8월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들어섰으며 1975년에는 높이 236.7m의 송신탑인 남산타워를 완공하였고 1980년 10월 일반인들에게 전망대를 공개하였다. 남산은 서울 중앙에 있으면서 102만 9,300㎡의 산지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서울에서 가장 넓은 도심공원이 되었다.

남산케이블카 운행 광경 참고 이미지
남산케이블카 운행 광경(1962)
남산도서관 개관식 전경 참고 이미지
남산도서관 개관식 전경(1965)
남산식물원 참고 이미지
남산식물원(1970)

남산 제 모습 찾기사업

남산은 1990년부터 현대사의 비극과 아이러니를 벗어나 진정한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그 배경에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얻어낸 민주화의 힘이 컸다. 1990년 시작된 남산 제 모습 찾기사업은 정부기관 청사 등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공원을 조성해 시민 쉼터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 참고 이미지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1990)

그 결과, 국가안전기획부와 수도방위사령부가 이전하였고, 외인아파트와 미군 편의시설 등이 철거되었다. 대신 수도방위사령부 자리에는 서울특별시 지정 민속자료인 한옥 5채를 이전․복원하고 정원을 꾸민 남산골 한옥마을이 조성되었다. 이외에도 남산의 동·서·북쪽의 사면 일대에는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이 설치되어 서울 시민의 휴식처로 제공되고 있다. 또한, 자연학습장이 설치되어 학생들의 자연 학습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1994년에는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이하여 시민생활과 서울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서울 천년 타임캡슐에 담아 남산 자락에 묻었다.이 타임캡슐은 4백 년 후 서울이 1000년 되는 해인 2394년 11월 29일에 열릴 예정이다.

남산 제모습가꾸기_남산외인아파트 철거 참고 이미지
남산 제모습가꾸기_남산외인아파트 철거(1991)
(집필자 : 김정미)

참고자료

  • facebook
  • twitter
  • print

관련 기술서

주제목록 보기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