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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오늘도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일본 국교정상화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그리운 임 찾아 바다 건너 천릿길/ 쌓이고 쌓인 회포 풀려고 왔는데/ 임의 마음 변하고 나 홀로 돌아가네/ 그래도 임 계시는 서울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여기서 말하는 ‘바다 건너 천릿길’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닷길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쌓이고 쌓인 회포를 풀려고 왔지만 홀로 돌아가는 비련의 주인공은 일본여자이다. 아득한 옛날 어려운 일 이기고 백년을 같이하자 맹세를 했는데, 일본 측 부모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그만 한국으로 돌아와 버린 남자를 뒤늦게 찾아왔지만, 이미 그 남자는 다른 여인과 자식까지 낳고 살고 있다. 그야말로 세월이 임을 앗아 울면서 가야 하는 여인의 이야기, 1968년 당시 TBC-TV에서 방송된 인기연속극 ‘서울이여 안녕’의 스토리텔링이다.

노래 가사만 들어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드라마는 그 시점으로부터 불과 2,3년 전만 해도 방송 불가였을 것이다. 일본이란 나라하고 있었던 일, 일본이란 말만 해도 극도의 거부감을 일으키던 시대에 일본 여자와의 러브라인이라니! 그리고 어떻게 일본사람이 국교가 끊어진 한국에 온단 말인가.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그때의 정서로서는 말도 안 되는 드라마라고 했을 것이다.

근데 1968년에 이 드라마가 나가자 아무도 그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상대가 누구든 그저 사람 사는 세상에 있을 수도 있는 한편의 안타까운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였다. 불과 얼마 전부터 일본인이 합법적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한국과 일본,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뤄진 직후의 일이었다.

한일회담 대표단 출국전 기념촬영 썸네일 이미지
한일회담 대표단 출국전 기념촬영(1961)
한일회담 반대데모 썸네일 이미지
한일회담 반대데모(1964)
샘플 썸네일 이미지
제1차 한일회담(1965)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이라는 격랑을 거치면서 일본과의 사이에 정치적 문제는 물론 감정적으로도 도저히 용납 안 되는 해묵은 역사적 숙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 숙제를 푸는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가 1965년에 해결되었기에 이런 TV드라마도 가능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국가 간의 국교를 맺는 외교적 행위가 모든 조약과 협정의 체결이라면, ‘서울이여 안녕’과 같은 드라마는 두 나라의 국민들이 인간적으로 풀어야 하는 일종의 민간 차원의 또 다른 국교정상화가 아닐까.

사실 한일국교정상화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부터 나왔던 이야기였다. 전쟁도 전쟁이지만 지정학적으로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서로 국교도 맺지 않고 지내기가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그 문제로 일곱 차례나 오가면서 협상을 했지만 결코 쉽게 풀리지 않았고, 시간은 자꾸만 흘러 5.16 이후 새 정권이 들어서서야 다시 국교정상화를 위한 본격적인 한일회담을 재개할 수 있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일본과 미국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물이었다. 국가재건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새로 들어선 한국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이 필요했고, 이미 고도성장을 이룬 일본은 또 다른 시장으로 한국이 절실히 필요하던 때였다. 거기다 미국은 공산주의에 맞서 한국과 미국과 일본의 군사 경제적 블록화가 절실해졌다. 다들 계산은 다르지만 기왕에 맺어야 할 관계라면 서로가 필요로 할 때 매듭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서두르게 되었다.

한일회담에 관한 건 썸네일 이미지
한일회담에 관한 건(1952)

당시 우리는 아프리카나 동남아 어느 나라보다 못사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누구도 돈 한 푼 빌려주려고 하지 않던 때였다. 1인당 국민소득 겨우 80불, 인구증가율은 3%에 달하고, 연간 2억 달러 정도의 남의 원조자금으로 겨우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연간 수출액은 겨우 4천만 달러에 수입액은 거꾸로 3억 달러가 넘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부조직법을 새로 만들고 각종 법령과 제도와 기구를 재정비하며 ‘건설의 정부’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기본적인 자본의 뒷받침이 없는 한 모두가 헛구호에 불과했다. 어차피 넘어야 할 국교정상화라면 우리가 절실히 필요할 때 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한일회담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정부의 한일교섭과 조속타결의 움직임이 알려지자 1964년 벽두부터 국민들의 저항은 만만찮았다. 그 해 2월이 되자 정부는 도쿄에서 정치협상을 벌이겠다고 서둘렀고, 여당과 함께 일본에 대한 교섭의 기본방침을 밀고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3월에 농업장관회담, 4월에 외무장관회담을 개최한다는 협상스케줄이 발표되자 급기야 재야의 모든 세력들은 총궐기하여 구국의 봉화를 들어야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한일국교정상화반대투쟁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동시에 전국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한일협상반대시위에 불을 붙였다. 그들은 아예 대일(對日)굴욕외교로 규정지었다. 그때가 1964년 6월 3일, 이른바 ‘6.3항쟁’, ‘6.3사태’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 ‘6.3사태’ 또는 ‘6.3항쟁’을 주도했던 각 대학의 학생회장들은 훗날 대부분 정계로 진출했다.

한일회담 가조인식 썸네일 이미지
한일회담 가조인식(1965)
한일회담 본보인식 썸네일 이미지
한일회담 본보인식(1965)
정일권 국무총리 한일회담 조인 담화발표 썸네일 이미지
정일권 국무총리 한일회담 조인
담화발표(1965)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이 만들어지고, 1965년 6월 22일 일본의 총리관저에서 역사적인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간의 국교가 비로소 정상화되었다. 이때의 조약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국교에 관한 기본조약과 이에 부속된 4개의 협정, 그리고 25개의 문서를 총칭하는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4개의 협정이란 어업과 재일교포 법적지위와 대우, 재산청구권과 경제협력, 문화재와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다. 또한 이 기본조약은 한일병합 및 그 이전에 양국 간 체결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일본은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우리나라에 지원하기로 했다.

한일국교 정상화 썸네일 이미지
한일국교 정상화(1965)

하지만 이렇게 결론이 난 한일협정에 대해서 불만의 목소리는 두고두고 남았다. 우리가 그은 평화선을 없애고 12해리 해역을 인정해 일본어선이 침범하게 된 점, 약탈해 간 문화재반환을 어렵게 한 점, 일제강점기에 저지른 만행에 대한 일본의 공식사과가 빠지고 겨우 그 정도의 청구권 밖에 받아내지 못했느냐는 등의 지적이다. 그보다 더 아쉬운 점은 일찍이 우리는 ‘서울이여 안녕’이란 드라마도 나왔는데, 정작 국교정상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본과 일본인들의 태도는 아직도 멀고도 가까운 나라로만 느껴지고 있다는 현실이다.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국방일보, 「한일국교정상화」, 국방홍보원, 2015.6.21.
  • 다음백과사전 (http://10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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