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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법으로 ‘우리 땅’의 꿈을 이루다  농지개혁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울 어머니 살아 생전에 작은 땅이라도 있었으면 / 콩도 심고 팥도 심고 고구마도 심으련만 / 소중하고 귀중한 우리 땅은 어디에(한돌 “땅” 가사)

농지개혁사업 정리에 관한 건(1961, BA0084259(16-1)) 참고이미지
농지개혁사업 정리에 관한 건(1961)

농업이 국가경제의 기반산업이었던 우리나라에서 자기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자립과 안정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자기 땅을 갖지 못한 채로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지불하는 소작농의 신세였으며 소작료는 전체 소출의 절반에 달하였다.

우리나라의 소작제도(小作制度)는 삼국시대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오랜 세월동안 세습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1918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소작농의 권리인 경작권, 도지권, 개간권, 입회권 등의 모든 권리는 소멸되고 일방적으로 지주의 권리만 강화되었다.

일제강점기 소작농이 겪어야 했던 가혹한 현실은 1945년 8·15 광복 전후의 농지소유 실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농지 총면적 220만여ha로 1호당 평균 1.078ha였는데 그 중 소작농이 경작하는 비율이 64%이었다.

광복 이후 농지개혁법이 시행되다

가혹한 소작제도의 시행으로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던 우리나라는 광복과 더불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일본인 소유였던 29만여㏊의 귀속농지를 처리해야 했으며 사회 경제적으로는 전농가의 86%가 소작농, 전농지의 64%가 소작지인 상태에서 농업생산력과 농가경제의 향상을 위하여 지주적 토지소유의 해체를 필요로 했다.

농지개혁은 두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는데 첫 단계는 미군정기의 제1차 농지개혁이다. 미군정은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농지의 한국 귀속을 위해 미군정 법령 제52호(1946.2.12.)에 따라 신한공사(新韓公社)를 설립하였다.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가 소유한 전 재산 및 조선 내 법인의 일본인 재산을 신한공사에 귀속시켜 ‘귀속농지’라고 규정하면서 농지개혁의 기본정책 수립에 착수하였고 1948년 3월 11일 「과도정부법」을 공포하여 신한공사가 관리하고 있던 일본인 소유농지, 즉 귀속농지에 한하여 우선 농지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일본인 소유농지였던 귀속농지가 미군정의 관리 하에 해당농지를 경작하였던 농민에게 분배되었다.

제2차 농지개혁은 국내의 모든 한국인지주가 소유하고 있던 110만㏊를 대상으로 하였다. 1949년 2월 5일 정부는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농지개혁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관보 제116호 농지개혁법(1949, BA0200337(1-2)) 참고이미지
관보 제116호 농지개혁법(1949)

이후 정부는 모든 지주의 3ha 이상 토지를 의무적으로 매도하게 했으며, 농민들에게 3ha 이하의 토지를 분배하였다. 여기서 호당 3㏊를 초과하는 농지를 매수대상으로 한 것은 3㏊를 경작 상한선으로 본 것이고, 이는 일하는 소를 포함한 5인 가족의 노동력을 참작하여 실제로 경작할 수 있는 한계치로 본 것이다.

해방 후 4년 7개월이 지난 뒤에야 농지 개혁이 시행되었지만 이로 인해 한국에서 지주계급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토지 소유 면적은 증가하게 되었다. 농지개혁에서 농지를 분배 당한 지주에게는 농지의 대가로 그 농지의 1년 수확량의 150%를 보상하되 그 액수를 기재한 지가증권을 발급해주고 1년에 30%씩 5년에 연부보상(年賦補償)하도록 하였다.

정부는 지주들이 지가증권(地價證券)을 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권장하였다. 지주들이 지가증권을 통해 일반 산업 투자에 참여할 수 있게 함으로써 농업과 공업을 함께 발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6.25전쟁과 농지개혁

농지개혁이 구체적인 실시단계에 들어갈 무렵인 1950년, 6.25전쟁의 발발로 인해 경상남도 일대를 제외한 전국에서 농지개혁이 부득이 중단되었다가 관계서류가 소실되거나 분실되는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9·28서울수복과 더불어 다시 착수되었다.

전쟁 중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게 된 이유는, 첫째, 전란으로 가중된 재정상의 핍박을 덜기 위하여 귀속기업체와 귀속농지를 불하(분배)하여 국고수입을 늘이고자 함이며 둘째, 환수되는 지가상환미(地價償還米)를 군량미로 활용하고자 함이었다. 실제로 1950년 가을부터 분배농지의 상환곡은 전국에 걸쳐 수납되기 시작하였다. 농지개혁은 6.25전쟁의 발발로 인해 당초의 5년 상환계획이 늦추어졌으며 1961년 5월 11일 「농지개혁사업정리요강」을 제정하여 1964년까지 종결하도록 기간을 연장하였다.

수복지구 농지개혁 실시에 관한 법률(1957, BA0084208(67-1)) 참고이미지
수복지구 농지개혁 실시에 관한 법률(1957)

1953년 7월 휴전이 되면서 남한에 귀속된 38선 이북 수복지구에 대한 농지처리문제가 대두되자 정부는 1958년 4월 10일 「수복지구에 대한 농지개혁법시행에 관한 특례」에 바탕을 두고 농림수산부가 ‘수복지구농지개혁사무처리요강’을 작성하여 4월 20일부터 이 지역의 농지개혁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수복지구 농지개혁에 의해 분배된 농지면적은 일반 농지 2,880㏊(전답) 귀속농지 903㏊(전답) 합계가 3,783㏊에 달하였으며, 8,254호의 농가에 분배하였다.

2차례에 걸친 농지개혁의 성과와 한계

두 차례에 걸쳐 시행된 농지개혁은 귀속농지 29만여㏊와 한국인 소유농지 3만여㏊를 합해서 모두 61만여㏊를 분배하였다. 이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조사된 소작지 140만여㏊의 42.4%에 불과하다. 나머지 57.6%인 83만여㏊는 지주들이 직접 농사를 짓거나, 임의로 미리 처분하거나 은닉함으로써 개혁대상에서 제외된 셈이다.

한편, 1951년 4월 통계에 의하면 「농지개혁법」에 의해 적법한 분배사업이 이루어지고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보상받은 지주는 24만여명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의 발발로 인해 지가증권의 가치 하락과 감가 양도가 이루어져 지주들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였으며 농민들 역시 흉작으로 상환액을 납부하지 못하여 토지를 되파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이 분배받은 농지를 되팔게 되고, 이를 부농(富農)이 겸병함으로써 신흥지주계층(新興地主階層)과 소작제가 부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농민들이 농토를 소유하고 농업의 터전으로 삼는 건전한 농가경제를 기대하였던 「농지개혁법」 소기의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과 의미는 분명하다. 오랜 세월 병폐로 작용하였던 농촌사회의 소작을 둘러싼 사회적 마찰을 해소하고 사회적·정치적 안정과 농촌의 민주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집필자 : 조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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