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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약 20여 년 동안, 서울의 동대문 근처에서는 매주 주말마다 어김없이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함성이 터져 나왔다. 중구 을지로 7가에 스포츠경기장 종합단지인 ‘서울운동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1984년 잠실에 서울종합운동장이 새로 생겨 그 이듬해부터는 이름조차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뀐 곳이다. 정확하게는 축구와 육상경기 등을 할 수 있는 다목적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야구장으로 구분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냥 통틀어서 여기를 ‘동대문운동장’이라 불렀다. 여름에는 수영장, 겨울에는 스케이트장도 열렸다. 각종 스포츠경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대사의 획을 긋는 대규모 군중집회도 여러 차례 열렸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곳은 서울시내에서 유일하게 함성이 터져 나오는 장소, 젊음의 해방구이기도 했다.

본래 이 장소의 일부는 조선시대 치안을 담당하던 하도감(下都監)과 군사훈련을 담당하던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있던 자리다. 또 일부는 서울의 성곽과 그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守門)까지 있었음이 2008년 재개발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일찍이 일제강점기인 1925년 준공, 1926년 3월 개장(일부 기록에는 1925년 10월 개장) 당시에는 동양 제일의 경기장으로 해방 전까지는 ‘경성운동장’이라 불렀다. 1960년대에 들어와 용산에 축구와 육상만을 할 수 있는 효창운동장이 문을 열었지만, 그 때도 사람들은 역시 동대문운동장을 서울의 대표적인 주요 복합스포츠단지로 대접할 만큼 명실공이 한국스포츠의 요람으로 인식했다. 1962년과 1966년에는 두 차례의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종목별 경기장도 늘리고 야간에도 경기를 할 수 있도록 조명탑을 여러 개 세워 야구와 축구경기가 비로소 밤에도 열리게 되었다.

서울운동장 및 서울시내 항공 촬영 썸네일 이미지
서울운동장 및 서울시내 항공 촬영(1956)
동대문운동장 전경 썸네일 이미지
동대문운동장 전경(1986)
동대문운동자에서 열린 벼룩시장 썸네일 이미지
동대문운동자에서 열린 벼룩시장(2004)

하지만 그 무렵에는 여성 스포츠팬들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그나마 운동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할 때였다. 그래서 차마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벌어지곤 했다. 예컨대 어느 날 관중석을 비추는 텔레비전 중계카메라에 자기 집 딸이 웬 젊은 녀석과 어깨를 감싼 채 나란히 앉아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잡힌다.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된 아버지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지금쯤 얌전히 집에 있어야 할 과년한 딸이 모르는 사내 녀석과 운동장에 가서 앉아 있다니! 당장 몽둥이를 들고 동대문운동장으로 달려가 딸을 내놓으라는 소란을 피웠다는 일화가 신문가십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소개될수록 동대문운동장을 찾는 젊은 청춘남녀들의 발길은 점점 늘어만 갔다. 때로는 맘껏 함성을 지르기 위해, 때로는 건전한 데이트장소로 동대문운동장을 즐겨 찾은 것이었다. 어떤 때는 전국체육대회를 보기 위해서, 어떤 때는 야구, 배구, 수영, 아이스하키, 스케이트대회를 보면서 젊은 날의 추억을 쌓고 나누었다.

제34회 전국체육대회_서울운동장 썸네일 이미지
제34회 전국체육대회_서울운동장(1953)

이곳 동대문운동장을 통해 나온 운동선수들이 결국 각 부문 국가대표의 주축을 이루고, 프로축구와 프로야구 원년의 경기도 모두 이곳 동대문운동장에서 치러졌다. 1984년 잠실올림픽주경기장이 개장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의 홈구장으로 수많은 A매치가 여기서 열려 한국축구의 성지로도 불렸다. 어디 그뿐인가.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8강전을 비롯한 여러 번의 국제축구대회들이 바로 이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온갖 선수들의 숱한 영광과 열정과 성취가 땀으로 얼룩진 곳이다. 그러다가 2007년 11월 이곳 동대문야구장에서 역사적인 마지막 야구경기가 끝나면서 드디어 철거작업이 시작되었다. 2008년 5월 18일에는 ‘굿바이 동대문운동장’ 행사를 진행했고, 주 운동장인 축구장도 철거작업에 들어갔다. 더 이상 변화의 물결과 시대적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파란만장했던 동대문운동장의 역사는 여기서 끝났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함성과 추억을 뒤로 하고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는 지금 동대문운동장기념관과 동대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화려했던 그 시절을 달래주고 있다. 그리고 2009년 5월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개장되었고, 2014년 3월에는 세계적인 걸작건축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문을 열어 손님들로 북적댄다.

한편 또 하나의 스포츠명물 ‘장충체육관’은 1960년에 기공식을 갖고 1963년 2월에 준공했다. 서울시 중구 장충동에 세워진 이 스포츠시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실내체육관이다. 현대식 원형경기장으로 원래는 육군체육관이었다가 대폭적인 개보수를 거쳐 본격 실내경기장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개장기념으로 제1회 동남아여자농구대회를 개최할 만큼 유명해졌다. 이 장충체육관의 건립으로 계절이나 날씨에 구애됨이 없이 실내경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경기관람을 마친 젊은 남녀들은 자연스럽게 바로 옆 장충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데이트를 이어가기도 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불후의 대중가요 가수로 요절한 ‘배 호’가 부른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란 노래도 이 무렵에 나와 크게 히트했다.

육군체육관 개관 썸네일 이미지
육군체육관 개관(1955)
장충체육관 개관식 썸네일 이미지
장충체육관 개관식(1963)
장충체육관 외부 전경 썸네일 이미지
장충체육관 외부 전경(1963)

그렇게 국내 최초의 실내체육관인 이 장충체육관에도 화려한 전성시대는 있었다. 배구, 농구, 종합격투기, 레슬링, 권투, 씨름 등의 각종 스포츠경기와 콘서트, 마당놀이 등의 문화공연도 쉬지 않고 열렸다. 방송사의 10대 가수상과 가요왕을 선발하는 생방송, 대학가요제 공연 등도 몇 차례씩 펼쳐졌다. 1970년대에는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와 미스코리아선발대회의 단골장소로도 쓰였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뽑는 일종의 간선제 대통령 선출과 취임식도 1987년 전까지는 이곳 장충체육관이 무대였다. 그래서 ‘체육관대통령’이란 말까지 나왔다.

장충체육관 개관 썸네일 이미지
장충체육관 개관(1964)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농구선수로 알려진 박신자, 박찬숙, 신동파도 모두 이 장충체육관 시절에 배출되었다. 박치기로 유명한 프로레슬링의 ‘김일’ 선수도 온갖 반칙을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다가도 으레 이 장충체육관에서만은 끝내 통쾌하게 상대를 물리치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기도 했다. 한국 복싱의 영웅 세계챔피언 김기수 선수도 장충체육관이 그의 전성기 때 링이었다. 천정이 떠나갈 듯한 열기와 함성이 넘치던 장충체육관은 2015년 1월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초현대식 최신시설로 거듭났다. 역사 속의 동대문운동장과 새 모습의 장충체육관은 누가 뭐래도 한국스포츠의 자랑스러운 요람인 것이다.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브리태니커, 한국브리태니커회사
  • 신동아, 『개항백년 연표자료집』, 동아일보,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