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라운드는 1986년 9월 남미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서 개최된 제8차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각료회의가 출발점이다. 우루과이에서 개최했기 때문에 이 라운드를 우루과이라운드라고 한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은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인 보호무역주의를 완화하고 자유무역주의에 입각한 세계경제체제구축을 위해 1948년 1월 1일에 조인된 국제 무역 협정이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은 관세를 폐지하고 자유 무역을 실현하기 위해 1947년부터 1979년까지 7차례에 걸쳐 다자간 협상을 주관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7차례에 걸친 다자간 협상에는 지역명과 라운드(Round)를 합쳐 하나의 이름이 붙여지는데 국제통상에서 라운드는 둥그런 테이블에 가능한 모든 분야를 모아놓고 각국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주제를 하나씩 논의하는 양국 간 협상과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1947년 제네바 협상 라운드에서부터 5회 라운드인 1961년의 제네바 딜론에서의 라운드까지는 주로 관세인하협상이 이루어졌으며, 1964년부터 시작한 제6회 케네디라운드에서는 비관세장벽에 대한 협상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1973년부터 시작한 제7회 도쿄라운드에서는 비관세장벽에 관한 11개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은 무차별 대우의 원칙, 양적제한의 철폐, 관세 인하를 주요 내용으로 하며,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로 대체되기 전까지 세계 자유 무역 실현을 위한 기본 구조를 제공하였다. 전 세계 120여 개국이 가입하였으며, 우리나라는 1967년 4월 1일부터 정회원국이 되었다.
1980년대 이전 세계 무역은 무역 보호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이었다면 1980년대 이후에는 두 가지 무역 정책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즉, 1980년대는 나라마다 빗장을 걸고 보호무역 정책을 펼치거나 지역 단위의 자유무역주의로 발전하여 북미, 서유럽, 아시아 등 이른바 3극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런 구조에 만족할 수 없었던 몇몇 자본들은 세계경제 질서의 흐름을 바꾸고자 시장 개방을 강력하게 추진했는데 미국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미국은 자국의 농업생산 과잉, 제조업의 쇠퇴 및 서비스 산업의 팽창 등으로 산업구조가 변화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에 미국은 농업과 서비스 산업 및 첨단기술의 비교우위를 무기 삼아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의도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통해 반영된 것이 우루과이라운드이다.
1986년 9월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서 시작된 우루과이라운드는 15개 분야에서 교섭이 진행되었으며 1989년 4월에 각 분야에 대해서 중간 합의가 이루어졌다. 원래 우루과이라운드는 1990년까지 타결을 목표로 하였지만 농산물, 지적소유권, 서비스무역, 섬유, 긴급수입제한 등의 분야에서는 첨예한 대립을 보여 1991년이 되어도 협상이 타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농산물협상은 각 나라가 안고 있는 여러 특성과 협상 당사국 사이의 기본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특히 더 어려웠다. 교착상태에 빠진 우루과이라운드를 타개하기 위해 1991년 12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사무총장이었던 둔켈(Dunkel)은 최종 협정문을 제시하면서 우루과이라운드의 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1992년 11월 20일에 미국과 유럽공동체(EC)가 백악관 블레어하우스에 모여 우루과이라운드의 최대 쟁점 중 하나인 보조금 감축 등에 대해 수정 합의에 이르렀다. 이어 1994년 4월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각국 간의 각료급 회의가 개최되어 세계무역기구 설립, 정부조달협정 등을 포함한 마라케시 합의문을 채택하면서 최종 협정문이 조인되었다. 이로서 몇 년간 끌어온 우루과이라운드는 완전 타결되었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타결된 내용은 모든 수입제한품목의 자유화, 농업보조금 폐지, 이중곡가제 폐지, 영농자금 융자중단, 수출보조금 철폐 등이었다. 그리고 세계무역기구의 설립에 대한 협상도 이루어져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를 대신할 ‘세계무역기구(WTO)’가 1995년에 설립되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체제가 포괄하지 못했던 농산물, 섬유, 무역관련 투자조치, 서비스교역 등을 국제무역규범 내로 흡수하였고, 무역과 관련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법적 구속력을 대폭 강화하였다. 우루과이라운드를 끝으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활동은 끝이 났다.
1967년 4월부터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정회원국이 된 우리나라는 가입과 동시에 우리 수출품이 최혜국대우를 받게 되면서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덕분에 1967년 세계 수출 66위에서 1972년 44위로 22계단 뛰어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도쿄라운드부터 우루과이라운드 개시 이전까지인 1973년에서부터 1985년까지 우리 교역의 증가율은 세계교역증가율을 상회하는 높은 성장을 하였고, 1985년에는 우리나라가 세계 수출 13위를 기록하며 주요 수출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우리나라는 서비스교역 성장, IT제품 수출 증가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1990년 초반에 농산물 개방이라는 큰 파도를 만났다.
1993년 2월 15일, 동국대학교에서는 2만여 명의 농민들과 학생,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우루과이라운드 거부 및 쌀 전량수매 쟁취를 위한 전국농민대회’가 열렸다. 이날의 대회는 우루과이라운드 거부를 내걸고 열린 최초의 대규모 대회였다. 농민들은 이 날 ‘농가소득의 40%를 차지하는 쌀 시장을 개방하는 것은 600만 농민들의 생명줄을 끊는 것이다’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쌀 시장 개방을 반대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혀줄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농민들의 대회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우루과이라운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분야가 농업이었기 때문이다. 수입이 제한되고 있었던 대부분의 품목을 1997년 7월 1일자로 자유화하여 유제품을 비롯한 일부품목을 제외하고는 비관세장벽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외국 농산물과 우리 농산물은 관세가 부과된 상태에서 가격경쟁을 해야 했다.
농산물 시장의 개방에 따라 외국에서 들어오는 농산물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1995년과 대비해 2011년 마늘은 5배, 바나나는 3배, 오렌지는 9배로 수입량이 늘어났으며, 1983년 농림수산물의 수입자유화 비율은 56.6%였는데 1995년 95.6%로 뛰어 오르더니 2002년 99.1%를 기록한 이래 지금까지 그 수치가 유지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호주산 쇠고기로 만든 불고기와 중국산 김치로 식탁을 차린다. 또한 후식으로 칠레산 포도와 미국산 오렌지를 먹고 있다. 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밥상에 오른 먹거리의 대부분은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이제는 많은 품목이 외국산으로 채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