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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만리장성 넘어 동반관계로... 한국-중국 수교

우리나라와 중국이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사실상의 적대국으로 지내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 1948년 정부수립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중국은 사회주의체제를 채택하고 소련과 함께 지구촌 공산진영 맹주의 한 축으로 등장했고,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체제로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해 분단과 더불어 사회주의 공산국가가 된 북한과 대치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 본토를 장악한 중국공산당정부, 즉 중공과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면서 타이완으로 쫓겨나 자본주의 민주국가를 설립한 장개석 정부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터지고 당시 중국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은 6.25전쟁에 참전, 수십만 병력을 동원하는 인해전술로 북한을 도와 전세(戰勢)를 뒤집기도 했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나라와 중국의 양국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말하자면 동서 양 진영의 이데올로기 틈바구니에서 벌어지고 갈라선 것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흐르고 세상은 변하여 1988년 7월 7일 우리나라는 88서울올림픽과 함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내놓게 되었다. 남북한 간은 물론이고 사회주의 공산권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나름의 강력한 의지를 표방하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북방외교’의 시동이다. 여기서 북방(北方)이란 구체적으로 소련과 중국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한국과 중국의 수교문제도 사실상 그 연장선에서 다뤄지고 있었다. 물론 그 이전인 1983년 5월에 중국민항기가 춘천에 불시착한 사건이 발생해 양국 정부관계자들이 처음으로 공식대면을 하고 마주앉은 일이 있긴 했다. 이후 한국-중국 두 나라는 체육과 관광, 이산가족문제와 친척방문 등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사실상의 교류를 시작하였다.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는 중국이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0년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서로의 선수단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등 점점 화해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그러는 사이 1989년 12월에는 미국과 소련이 몰타회의에서 냉전종식을 선언했고, 그때까지 삐걱거리던 중국과 소련의 관계도 정상화되고, 1990년 9월에는 한국과 소련의 수교가 수립되는 실로 놀란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한-중 수교 역시 이런 국제적 변화의 흐름과 양국의 현실적 필요성 등이 디딤돌이 되어 진행되기 시작했다.

한국-소련 수교조인식 썸네일 이미지
한국-소련 수교조인식(1990)
노태우 대통령 중국무역대표부 임명장 수여 썸네일 이미지
노태우 대통령 중국무역대표부
임명장 수여(1991)
한국-중국 협정서명식 썸네일 이미지
한국-중국 협정서명식(1992)

우선 그 첫 과정으로 1990년 한국과 중국은 양쪽에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영사기능을 일부 수행하며 교류를 열었다. 그리고 1991년 9월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게 되고,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고려해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하는 등 남북한 관계 개선을 위한 의미 있는 조치들이 연달아 취해졌다. 바로 이 무렵을 전후해 한-중 외무장관회담이 이뤄지고, 그 결과 1992년 4월에 드디어 한중수교협상이 열리게 되었다. 냉전종식과 동시에 개방개혁의 실용주의를 기치로 내건 중국은 모든 정치를 먹고사는 경제문제에 집중시키면서 우리나라의 성공적인 경제기적의 노하우가 필요했고, 우리나라는 한국대로 이제는 이념을 떠나 거대한 중국시장을 놓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을 언제까지 북한만의 우방으로 내버려둬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중국은 중국대로 시종일관 ‘하나의 중국’ 정책을 펼치고 있어서 대만을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한국의 입장을 바꾸고 싶은 입장이었다. 긴 역사로 보면 냉엄한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성국가도 없는 법. 오로지 자기네 나라의 이익과 국력으로 가까이도 하고 멀리도 지내는 외교적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대만을 버리고 중국을 택했다. 그리고 중국은 자기네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우리나라와의 수교를 택한 것이었다.

한-중 수교 썸네일 이미지
한-중 수교(1992)

한-중 수교협상은 그리 길게 끌지도 않았다. 그해 4월에 협상을 시작해 약 넉 달 만인 1992년 8월 24일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한-중 수교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양국관계의 새 장(章)을 여는 국교가 수립되었다. “첫째,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양국 국민의 이익과 염원에 부응하여 1992년 8월 24일자로 상호 승인하고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로 시작된 공동성명은 모두 6개항으로, 유엔헌장의 원칙에 의거 상호존중, 상호불가침과 상호내정 불간섭, 평등과 호혜, 평화공존 등을 천명했다. 또한 중국의 유일합법정부로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한반도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 등이 포함되었다. 이로써 한-중 수교에 따른 중국과의 외교적 절차는 마무리되었다.

이상옥 외무부장관, 전기침 중국 외교부장 수교 조인식 후 악수 썸네일 이미지
이상옥 외무부장관, 전기침 중국 외교부장
수교 조인식 후 악수(1992)
주 중국 한국대사관 썸네일 이미지
주 중국 한국대사관(1992)
한중수교 14주년 기념 중국 NEW LEADER 방한단 환영행사 썸네일 이미지
한중수교 14주년 기념 중국 NEW
LEADER 방한단 환영행사(2006)

수교가 이뤄진 1992년 9월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는 역사적 이벤트가 있었고, 1995년 11월에는 장쩌민 중국주석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양국의 총리회담과 정부관계자들의 상호방문이 이어졌으며, 이러한 한-중 교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분야로 확대돼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예컨대 교역규모는 2012년 현재 기준으로 수교 당시에 비해 무려 35배나 증가했고, 사회적 문화적 교류도 급격히 늘어나 중국 내에서 이른바 ‘한류(韓流)열풍’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텔레비전 드라마들이 중국에 진출해 선풍을 일으키더니, 그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팝뮤직 K팝과 각종 전자제품과 휴대전화기가 붐을 일으켰고, 지금은 수많은 중국관광객들의 우리나라 방문과 함께 K-뷰티로 불리는 한국산 화장품들이 날개 돋친 듯 인기를 얻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 중국 공식방문 썸네일 이미지
노태우 대통령 중국 공식방문(1992)

하지만 수교 후 반드시 우리한테 유리하고 긍정적인 일들만 있었던는 것은 아니었다. 농수산물과 심지어 김치 등의 식품과 의류와 값싼 생활용품들 등 모든 분야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가 무차별로 들어와 우리를 힘들게도 하기도 했다. 전체규모 면에서 본다면 중국과의 수출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리 경제가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만큼 이제 중국은 우리에게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가 되었다.

한편 한미동맹관계로 인해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는 아직도 불완전하고 불안한 동반자 관계라고 평가하는 견해들도 여전히 나온다.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됐고, 이는 곧 강대국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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