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통에서 흔히 쓰이는 말로 ‘다다구리친다’라는 은어가 있다. ‘다다구리친다’는 리어카 위에 상품을 늘어놓고 호객 행위를 하며 물건을 파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은 좌판을 펴놓고 ‘골라 골라~ 골라들 봐요, 싸다 싸다 싸구나 싸’를 외치며 2박자의 장단에 맞춰 쿵작쿵작 발을 구르고 짝짝 손뼉을 치며 손님들의 눈길을 끄는 모습이다. 이는 삶의 활기가 느껴지는 곳,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울의 남대문시장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남대문시장은 입지조건이 좋다. 한양의 정문인 숭례문 옆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물자들이 오고 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1414년(태종 14) 남대문 언덕의 도로 양 편에 시전을 설립하고 상인을 지정해 빌려주는 정부임대전(政府賃貸廛)들이 장사를 하였다. 상점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좌판들도 늘어서게 되었고 대규모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남대문 일대에서 본격적인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 지금의 남창동에 선혜청(宣惠廳)이 설치되었다. 선혜청은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로 대동미, 대동포, 대동전의 출납을 관장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선혜청 주변에는 지방의 특산물 등을 매매하는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객주, 여각 등이 많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저잣거리가 생성되었다. 특히 남대문 안쪽의 시전행랑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남문내 시장과 남대문 밖에서부터 서울역까지를 아울렀던 칠패가 있었다. 칠패는 조선 후기 서울의 3대 시장의 하나였다. 남문내 시장과 칠패는 1897년 남대문로 정비 사업으로 인해 모두 선혜청 안으로 옮겨져 재편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상설 시장인 선혜청 창내장(宣惠廳 倉內場)으로 지금 남대문 시장의 직접적인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선혜청 창내장은 초기에는 남대문로 일대에서 철거된 상인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점차 선혜청 앞에서 노점 형태로 장사하던 이들까지 합세해 상업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쌀가게, 과일가게, 건어물상과 생선가게, 그리고 잡화점 등이 자리잡았다. 1899년 2월 선혜청 창내장에는 과일가게 3곳, 쌀가게 14곳, 어물전 36곳, 생선가게 3곳, 행상 10곳, 담뱃가게 22곳이 있었다. 당시 객주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돗자리 째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흔히 남대문 시장을 ‘도떼기시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렇듯, 선혜청 창내장은 소매시장이면서 돗자리 째로 물건을 파는 도매시장이기도 했다. 선혜청 창내장이 왕성하게 상업 활동을 하자 농상공부에서는 1899년부터 세금을 받기 시작하였고 1901년에는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내장원에서 직접 세금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상인들이 남대문의 상권을 장악했으며 1914년 조선총독부령인 「시장규칙조례」를 재정하면서 남대문시장을 해체하려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친일파 송병준이 선혜청의 장터를 15년 동안 임대를 하면서 그가 운영하던 조선농업주식회사에서 남대문시장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1922년부터 일본인이 운영하는 중앙물산주식회사로 시장의 경영권이 넘어갔고 1936년에는 명칭도 중앙물산시장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남대문시장의 주요 거래 품목은 미곡과 과일, 채소, 생선 등 농수산물과 식료품이었으며, 특히 일본인들이 즐기는 어묵이나 초밥, 왜간장 등도 판매하였다. 당시 남대문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물품 중의 하나는 요즘도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는 김이었다. 1926년을 기준으로 7년 동안 거래액이 무려 30배나 증가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김이 팔려나갔다.
남대문시장도 6.25전쟁은 피해갈 수 없었다. 전쟁 후 남대문시장은 점포가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 상인들은 이 폐허에서 노점을 펼쳐놓고 장사를 했다. 1950년대 남대문시장은 전후 복구를 위한 구호물자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 등을 거래하며 규모를 키웠다. 미군의 군수품을 많이 취급하면서 ‘양키시장’이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 군수품이 많이 거래되던 시절에는 ‘돈만 충분하면 각종 부속품을 구해 탱크도 조립할 수 있다’는 농담이 돌았을 정도였다. 남대문시장의 또 다른 별칭은 ‘도깨비시장’이다. 미군 PX(군부대 기지 내의 매점, post exchange)에서 흘러나온 양담배, 밀수품인 프랑스제 화장품 등이 넘쳐나면서 이를 단속하려는 당국과의 숨바꼭질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도깨비시장은 단속경찰이 들이닥치면 번개처럼 상품을 숨겼다가 경찰이 가고 나면 잽싸게 물건을 다시 펼쳐놓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즘 남대문시장에는 수입전문 도매상가가 자리하고 있으면서 합법적인 거래로 전국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다. 이 무렵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북쪽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많이 자리를 잡으면서 ‘아바이시장’이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
남대문시장에는 유독 화재가 많이 발생했는데, 1954년 6월 23일, 1968년 11월 23일, 1975년과 1977년의 화재 등이 그것이다. 1954년 대화재로 점포 1,000여 곳이 소실되었고 이후 1958년 대지 약 1만 2,000평, 건평 약 2,000평 규모의 건물이 세워졌다. 1968년 발생한 화재로 C, D, E동과 국제시장 775개 점포가 소실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서울시는 남대문시장의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였고 1969년 1월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건물이 완공되었다. 이어 1975년 10월 추가 개설 허가를 통해 667개 점포가 생겼다.
대지면적 약 66,115제곱미터(㎡), 점포수 약 10,172개, 취급품목 의류 외 1,700여 종, 시장 종사자수 약 50,000명, 1일 출입고객수 40만 명, 1일 반입물동량 약 1,800톤, 1일 반출물동량 약 1,700여 톤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2016년 남대문시장의 현주소를 나타내고 있다.
아동복, 숙녀복, 액세서리, 귀금속, 그릇, 문구, 카메라, 안경, 꽃, 민속공예품, 인삼, 수입 명품 등 남대문시장은 다양한 품목을 판매하고 있다. 특히, 여성의류가 유명한데 한때 ‘남문패션’이라 불리며 우리나라 패션계를 선도하였다. 또한, 전국 아동복의 90% 이상을 남대문시장에서 취급했다. 1980년대 후반 남대문시장을 선도한 것은 액세서리와 그릇이었다. 액세서리 시장은 의류시장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호황이었으며 그릇을 도매하는 점포도 80개가 될 정도로 잘 팔려나갔다.
소비성향의 변화와 주변에 생겨난 대형 백화점 등으로 남대문시장의 상권이 약화되기도 했지만, 2000년대를 전후로 남대문시장은 탈바꿈을 하였다. 동대문시장에 집중된 의류 시장의 명성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여성 전문 패션몰 등을 개점하였고 판매 물품을 인삼과 김, 김치, 가죽 제품 등 외국인들의 취향에 맞는 물품도 갖추어 놓았다.
남대문시장은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외국관광객들은 남대문시장을 관광코스에 꼭 포함시키고 있다. 원하는 상품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고, 덤이라는 흥정의 재미도 느낄 수 있으며, 한국 음식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건 남대문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흥정을 할 때는 우리나라 말로 ‘비싸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남대문시장을 찾는 외국인관광객이 많다는 것이다. 남대문시장에는 먹을거리의 천국이라 할 만큼 다양한 음식이 있다. 특히, 양은냄비에 국산 갈치와 무를 칼칼하게 조려내는 갈치조림골목이 유명하다. 이 골목은 1988년을 전후로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저렴한 가격의 갈치조림이 유명세를 타면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또한 보리밥, 칼국수, 냉면이 한꺼번에 나오는 칼국수골목도 남대문시장만이 가지고 있는 특화상품이다. 실물경제의 흐름을 대변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시장 남대문시장은 365일, 24시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