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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나라는 경제전반에 걸쳐 새로운 선택과 방향을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1960년대에 1,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이제는 도약의 시점에 도달했는데,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 지가 당대의 화두였다. 그때까지의 경공업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며 안주할 것이냐, 아니면 여기서 한 번 더 모험을 해서 보다 큰 꿈을 이룰 것인가가 문제였다.

1970년대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두고 경공업에만 의존할 것이냐 이제부터는 통 크게 중공업으로 과감하게 방향을 틀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활발했다. 경공업 기조를 유지하면 안전하겠지만, 앞으로 큰 발전은 가져오기 힘들고, 중공업으로 가자니 너무 위험하고, 잘못 되면 지금까지 그나마 간신히 이뤄 놓은 것조차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여기서 중공업은 더 정확히 말해 중화학공업이었다. 단순한 중공업만이 아니라 화학공업까지 포함해서 한번 승부를 걸어보자는 뜻이었다. 마치 우리 경제가 압축 성장을 위해 대기업체제로 가느냐, 중소기업체제로 가느냐를 놓고 고민했듯이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었다. 그 결과 선택은 중화학 쪽이었다. 중화학공업과 경공업의 ‘투 트랙’(Two-track) 전략이었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결국 중화학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쯤에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 한국자동차산업, 다시 말해 국산자동차의 생산이었다. 국산자동차를 만들자는 시도는 민간부문에서 여러 차례 있었다. 1903년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처음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들어온 이래 기술도, 자본도, 관심도 없이 소달구지에 의존해 살아오다가, 1955년에 깡통을 두드리고 남의 중고엔진을 실어 처음으로 ‘시발(始發)’이란 차를 만들었다.

국산 시발 세단 썸네일 이미지
국산 시발 세단(1957)

그 후로 몇몇 자동차회사가 명멸하면서 일본과 제휴해 ‘새나라’ 자동차라는 것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1965년에 아시아자동차, 1967년에 현대자동차가 생겨났다. 이 과정을 지켜본 정부는 자동차산업을 정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하고 여러 가지 시책을 펼쳐나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동차산업은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가장 활성화하고 싶어 하는 분야였다. 부가가치와 고용창출, 동시에 제철이나 정유 등 연관 산업을 동반 성장시키고 타 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 수립해 놓은 자동차공업종합계획을 다시 손질하고, 국산자동차 장려시책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민간자동차회사들의 공장부지 선정을 지원하고, 자동차공장 건설을 위한 자본재 도입계약에 대해서도 정부가 지불보증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때를 맞춰 우선 내수용 자동차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국산 시발(始發)자동차 시운전 썸네일 이미지
국산 시발(始發)자동차 시운전(1957)
신진공업(주) 국산 자동차 생산 공장 썸네일 이미지
신진공업(주) 국산 자동차 생산 공장(1965)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썸네일 이미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1976)

그 결과 1975년에 드디어 국내 최초의 양산(量産)형 국산차인 현대 ‘포니’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포니’는 이듬해인 1976년에 남미 에콰도르에 8대를 수출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미국의 저가(低價) 자동차 시장에 현대 ‘엑셀’ 등이 약 20만대 정도 팔리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적 수준과는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하지만 그 격차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 1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서양의 유수한 자동차들과 당당한 경쟁을 벌이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아직은 핵심부품과 원천기술의 확보, 대중차의 이미지보다 프리미엄 브랜드 구축 등의 결코 만만찮은 숙제들을 안고는 있지만, 지금 전 세계 현지공장에서 생산 판매되는 우리 자동차의 양적인 위치는 세계 5위로, 실로 놀라운 성장이자 발전인 것이다. 다른 나라 기술을 구걸해가며 자동차를 만들던 우리 자동차회사들은 이제 세계 10대 엔진에 선정될 만큼 눈부시게 발전해 그들에게 거꾸로 수출을 하는 단계까지 성장했다. 지금은 지구촌 어딜 가나 한국산 자동차가 쌩쌩 달리지 않는 곳이 없다.

포니 자동차 영국 수출 썸네일 이미지
포니 자동차 영국 수출(1985)

한편 자동차산업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밀어붙인 대표적인 중공업이 조선(造船)산업이었다. 일찍이 1958년 우리나라는 이른바 「조선(造船)장려법」이란 달랑 두 장짜리 법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1967년에 와서야 비로소 대통령에게 ‘조선기술진흥대책’을 보고하게 되었고, 1969년에 ‘조선 관련공업 계열화방안연구보고’를 하고, 이때부터 정부의 중화학공업 추진정책과 맞물려 본격적으로 조선산업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조선기술에 새로운 연구 썸네일 이미지
조선기술에 새로운 연구(1962)

우리는 3면이 바다로 되어 있고, 특히 조선소 입지로 선정된 울산이나 거제지역이 대규모 제철공장과 가까워서 그야말로 잘만하면 틀림없는 ‘블루오션’(Blue-Ocean)이란 판단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먼저 울산의 현대조선소(지금의 현대중공업)가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 한 장을 들고 가 영국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는데 성공했고, 그 기공식이 끝나자마자 1973년에 거제도 옥포조선소가 기공되었다. 1974년에 현대조선소가 준공돼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만든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가 진수식을 갖고 대양을 향해 뱃고동을 울리며 미끄러져 갔다. 그리고 정부는 1976년에 ‘해운조선종합육성방안’을 발표해 우리 화물은 우리가 건조(建造)한 선박으로 실어 나르게 하였다.

옥포조선소 기공식 썸네일 이미지
옥포조선소 기공식(1973)
26만 톤급 유조선 명명식 썸네일 이미지
26만 톤급 유조선 명명식(1974)
제1호 한국 시추선 준공 및 명명식 썸네일 이미지
제1호 한국 시추선 준공 및 명명식
(1984)

드디어 지난 2003년부터는 우리가 일본을 제치고 선박을 주문받은 수주량과 선박건조량에서 모두 세계 1위를 줄곧 차지하고 있다. 중국이 추격해 오긴 하지만 세계 조선업계의 순위는 한국의 조선소들이 1위부터 5위까지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거제도의 대우해양조선,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현대미포조선 등이다. 5대양 6대주의 바다를 누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조선과 특수 선박은 거의 다 우리나라의 조선소에서 만든 배들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중화학공업의 성공을 이루고 마침내 경제대국으로 떠올랐다.

조선공업 : 수주실적 1위 우리 조선 썸네일 이미지
조선공업 : 수주실적 1위 우리 조선(1987)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김필수, 「한국자동차산업 과거를 통해 미래를」, 기호일보, 2013. 6.28.
  • 네이버 블로그, 「한국의 조선업스토리」, 2009.
  • 정몽구, 『현대 50년사』, 현대그룹 문화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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