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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날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영웅적으로 투쟁해온 결과가 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사’ 중)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경축행사에 참여해 남다른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1948년은 우리나라에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실현된 해이기도 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투표가 치러진 해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 많은 혼란과 갈등, 대립이 있었던 해이기도 했다. 만 3년간의 미군정시대를 마감하는 기쁨도 있었지만, 남과 북, 두 국가체제를 가진 분단국가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업무효율을 위해 하나로 뭉쳤던 정부중앙청사 시대

1948년 정부수립 당시 1실 11부 4처였던 중앙행정기관은 과거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을 중심으로 사무공간을 사용하였다.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정부종합청사 시대가 열린 것은 1970년이었다. 1967년 7월 29일 착공을 시작해 공사비 43억 8,950만 원이 들었다. 흩어져 있던 중앙 부처를 집중적으로 수용해 행정능률을 높이고, 국민의 이용 편의를 증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정부청사 상량 참고 이미지
정부청사 상량(1969)
중앙청 참고 이미지
중앙청(1945)
정부청사 신축공사 광경 참고 이미지
정부청사 신축공사 광경(1960)
신축 정부종합청사 건물 전경 참고 이미지
신축 정부종합청사 건물 전경(1969)

하지만, 이마저도 부족해 1981년 정부는 국민대학교 캠퍼스로 사용되던 건물을 매입해 창성동 별관으로 사용했다. 1970년 준공 당시 ‘정부종합청사’로 불렸으나 1997년 ‘정부대전청사’가 생기면서 ‘세종로청사’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다시 2년 뒤에 정부중앙청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2007년 정부부처의 세종특별자치시 이전계획에 따라 그 명칭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이뤄졌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 수렴을 위하여 ‘정부청사 명칭제정위원회’가 만들어져 2012년 정부중앙청사는 정부서울청사라는 새 명칭과 새 현판을 갖게 되었다.

정부청사, 지방시대를 열다. 세종로에서 과천, 그리고 대전으로...

1975년 수도권 중심의 인구집중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정부기관을 지방으로 분산 배치할 계획을 세웠다. 제2정부청사가 들어설 입지를 찾고 있었는데, 1977년 ‘대통령각하 지시사항보고(청사수급계획)’에는 새 청사의 입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1. 서울에서 1시간 정도 소요의 시간 거주지역
2. 기존 교통수단(전철, 고속도로, 구도로)의 이용이 편리한 지역
3 기존도시와 근접하여 제반기능 발휘가 용이한 지역
4. 행정수도를 감안한 지역(서울-신청사-행정수도)

대통령각하 지시사항 2차 보고_청사수급계획 참고 이미지
대통령각하 지시사항 2차 보고_청사수급계획(1977)

그리고 그 모든 조건을 고려해 최종적으로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문원리 일대가 결정되었다. 의외라는 반응들이 쏟아졌다. 한 신문 사설을 통해서도 당시의 놀라움이 느껴진다.

“『택지리』를 쓴 이중환도 과천을 지나가는 말로 한번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과천의 어중간한 위치 때문에 서울에 더부살이하는 동네쯤으로 알아온 게 지금까지의 우리네 과천 상식인 셈이다. 그런데 그 과천 땅에 볕 들 날이 왔다. 제2정부청사가 착공되면서 눈독 들인 사람들이 많았지만, 정부기관 이전계획이 구체적으로 발표되자 부동산 업자들의 눈에 불이 붙었다.”(「여적(餘滴)」, 경향신문 1982년 3월 20일자 기사)

그렇게 제2정부청사와 함께 과천면은 인구 6만의 과천시로 변모했다. 정부이전 계획과 함께 발표된 도시계획은 과천으로 유입되는 인구수를 늘려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의 이주를 도모하겠다는 애초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는 ‘균등한 지역발전’을 고민하게 되면서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와 행정기관을 분산시키기 위해 제3정부청사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전직할시 둔산지구가 제3정부청사의 건설지로 채택되었고, 당시 정보화 시대라는 흐름에 맞춰 초고속정보통신망을 구축한 최첨단 건물로 새로운 정부청사가 건설되었다.

대전 둔산지구 정부 제3청사 신축현황 참고 이미지
대전 둔산지구 정부 제3청사 신축현황(1997)
과천종합청사 참고 이미지
과천종합청사(2000)
정부대전청사 전경 참고 이미지
정부대전청사 전경(1998)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의 탄생

하지만 국토의 균형발전을 이루겠다는 소망은 여전히 요원해 보였다. 국토 면적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전 인구의 47.6%가 사는 과도한 수도권 집중과 과밀현상, 정치․행정․경제․사회․교육․문화 등 모든 기능이 수도권에 집중된 현실, 정부는 지역균형 발전의 답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에서 찾고 있었다. 세종특별자치시가 탄생하였고, 정부 각 부처는 정부세종청사에서 새 출발을 다짐했다. 2014년 3단계 이전이 완료되면서 행정중심복합도시, ‘정부세종청사’의 시대가 본 궤도에 올랐다.

정부청사는 중앙 공무원들이 사무를 보는 ‘하나의 장소’에 불과할 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 속에 나타난 정부청사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수도권 집중 현상 해소, 국토의 균형발전. 시대가 원하는 메시지를 실현하는 ‘도구’이자, 사회문제를 함께 고민해온 우리의 동반자였다.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경향신문, 「여적(餘滴)」, 1982.3.20.
  •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 정부청사관리소 (https://gbmo.go.kr/chungsa/main.do)
  • 한국일보, 「정부중앙청사 → 정부서울청사… 세종시 청사는 '정부세종청사'」, 2012.7.31.
  •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www.naacc.go.kr)
  • KBS, 「광복 60년 KBS 영상실록 -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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