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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5.16 직후 군사정권 시절의 구호는 “재건(再建)합시다”였다. 관공서의 공식행사나 한때 군에서의 경례구호도 “재건”, “재건합시다”였다. 나라를 다시 건설하자는 절실한 목표를 전 국민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로 내건 셈이다.

그러나 1950년대 자유당 정권시절에는 대체로 ‘부흥’이란 말을 많이 썼다.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뜻으로 광복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망가진 나라를 어떻게든 다시 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소망이 반영되었다. 그래서 그때 정부 부처 가운데는 ‘부흥부(復興部)’가 있었고, 훗날 건설부나 국토교통부 장관에 해당하는 부처의 장관을 ‘부흥부 장관’이라 불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여기 IBRD에도 분명 ‘부흥’이란 글자는 들어있다. 하지만 당시 우리가 내건 부흥과 이 IBRD의 부흥과는 실질적으로 통하거나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관계였다. 다만 우리의 부흥부 시절인 1955년 8월 26일 우리나라 한국은행의 건의에 따라 이 ‘세계은행’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기구에 가입한 상태였다. 국제부흥개발은행(國際復興開發銀行)은 영어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4년 7월 1일에 미국 브레턴우즈(Bretton Woods)에서 채택된 협정에 따라 설립된 일종의 세계은행이었다. 미국 워싱턴DC에 본부를 두고 실제 업무는 종전 후인 1946년 6월 25일부터 개시했다. 처음에는 전후복구와 경제부흥에 소요되는 장기개발자금을 보다 효과적으로 공급하자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쪽으로 지원을 펼쳐갔고, 단순한 자금지원 외에도 기술지원과 융자사업의 연구 등을 주로 해왔다.

국제통화기금협정 및 국제부흥개발은행협정 공포의 건 썸네일 이미지
국제통화기금협정 및 국제부흥개발은행협정 공포의 건(1955)

IBRD와 쌍둥이 역할을 하고 있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y Fund, IMF)에 가입하면 IBRD 회원국의 자격이 주어졌다. 바로 이 IBRD를 우리가 활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1950년대의 ‘부흥시기’가 아닌 1960년대 중반 ‘재건시대’였다. 부흥이나 재건이나 사실상 그 맥이 통하고 있는 개념이지만, 1966년에 IBRD의 우리 철도청에 대한 조사보고가 나온 걸 보면 대략 그 무렵부터 우리와 IBRD간의 관계가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때 경제개발도 해야 하는데 조달할 수 있는 국내 자본이 없었다. 국제부흥개발은행이든 어디든 가서 돈을 빌려와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회원국으로 가입만 해놓고 특별히 활용한 실적이 없는 IBRD의 문을 두드렸다.

그 첫 사업으로 우리 철도사업에 대한 지원요청에 따라 IBRD에서 타당성 여부를 조사한 것이다. 그리고 1969년에는 전천후 농업용수개발 차관을 위한 우리나라 정부와 IBRD 간의 보증 협정체결이 있었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IBRD와 함께하는 주요 국책사업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예컨대 1970년 한 해만 해도 낙농차관사업, 평택 금강 지구 차관사업, 철도차관사업 본격 추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차관협정체결 등 여러 분야에서 IBRD의 차관이 도입되었다.

IBRD 조사단 작업현장 시찰 썸네일 이미지
IBRD 조사단 작업현장 시찰(1970)
IBRD 조사단 화차제작능력 시찰 썸네일 이미지
IBRD 조사단 화차제작능력 시찰(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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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IBRD 부총재 접견 담화
(1975)

그 사이 우리 경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연 이은 성공으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실적 또한 일취월장하고 있어서 IBRD의 지원성과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IBRD는 지원 사업 중간에 ‘경제협력단’을 보내 작업현장을 순시하거나 잠정평가를 실시하고, 그때마다 또 다른 사업에 대한 개발을 돕고 지원을 늘려주었다.

1970년에는 우리나라가 대표이사에 선임되면서 IBRD 내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경주관광개발사업과 동해고속도로 건설 사업을 위한 차관협정체결이 1973년에 이뤄졌다. 광주권(圈) 지역개발 차관사업은 1974년에, 민간기업 육성을 위한 차관보증 협정체결이 1974년에 있었다. 그리고 충주다목적댐 건설을 위한 차관보증 협정체결이 1978년에 있었고, 1983년에는 제2차 경제구조조정 차관협정이 체결되었다. 말하자면 굵직굵직한 국책사업의 상당수가 IBRD의 차관에 의해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 후에도 여러 방면에서 IBRD와의 협력관계는 지속되어 경제발전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드디어 우리는 IBRD의 지원을 받아 성공한 나라의 모범사례가 되었고, 그만큼 실질적인 경제성장과 국제사회에서의 위상도 높아가고 있었다. 과거 6.25전쟁 이후 한동안 국제사회의 원조에만 의존해 겨우겨우 연명해가던 ‘코리아’와는 하늘과 땅 차이의 나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같은 IBRD의 회원국이면서도 감히 명함도 못 내밀던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어느새 당당한 주요 회원국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가 된 것이었다.

1985년에 들어와서는 서울에서 제40차 IBRD와 IMF 총회가 열렸고, 이때 24개 개발도상국 장관회의도 함께 열렸다. 회의에 참가한 IBRD 회원국들과 기자단은 판문점을 둘러보고 전쟁을 겪은 분단국가로, 그야말로 경제적 부흥을 이룬 한국의 기적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느냐는 일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불과 10여년 후 우리나라는 IMF의 구제 금융을 받는 쓰라린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도 우리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고 우리 경제의 심폐소생술에 극적으로 성공하였다.

IBRD·IMF 24개도국 장관회의 썸네일 이미지
IBRD·IMF 24개도국 장관회의(1985)
IBRD·IMF 기자단 판문점 시찰 썸네일 이미지
IBRD·IMF 기자단 판문점 시찰(1985)
IBRD·IMF 총회 본회의장 전경 썸네일 이미지
IBRD·IMF 총회 본회의장 전경(1985)
제40차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총회 썸네일 이미지
제40차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총회(1985)

IBRD와 우리나라는 결과적으로 영욕(榮辱)의 세월을 함께한 셈이다. 우리가 기댈 언덕이 없을 때 IBRD는 우리한테 큰 힘이 되어주었고, 농업용수개발과 낙농사업, 고속도로와 댐 건설 등 결정적 순간마다 손을 잡아주었다. 현재 세계은행, IBRD는 1인당 국민소득 2,850달러 이하인 회원국에 대해서는 연 8.82%의 이자율과 3-5년 거치, 12-15년 분할상환의 조건으로 융자를 제공한다. 설립 이후 융자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부문은 주로 에너지와 농업, 운송 등이었고, 대표적인 주요 차입국 가운데는 브라질과 멕시코, 인도네시아와 한국 등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들 나라 대부분이 여전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치열한 세계경제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오늘날 경제대국을 지향하며 나름의 성공신화를 써나가고 있다.

(집필자 : 신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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