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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 판소리

판소리는 소리꾼 한 사람이 북을 치는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사설(이야기)’과 노래, 몸짓을 섞어서 연기하는 전통적인 민속악의 한 양식이다. ‘사설’은 문학, 노래는 음악, 그리고 몸짓이나 고수의 추임새 등은 연극적 성격을 가지므로 종합예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소리’, 말하는 것은 ‘아니리’, 몸짓을 하는 것은 ‘발림 한다’고 하는데, ‘아니리’를 할 때 고수는 북을 치지 않고 소리꾼이 자유로이 표현하도록 두다가, 적당한 대목에서 “얼씨구 좋다!” 또는 “으이 좋지!” 라며 소리치는 것을 ‘추임새 넣는다’고 한다.

넓은 마당이나 큰 대청마루에 서서 부채를 들고 푸른 두루마기에 갓을 쓴 소리꾼이 노래와 대사 그리고 몸짓까지 동원해 관객을 웃기고 울리면, 고수뿐만 아니라 관객도 함께 ‘추임새’를 넣는다.

판소리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충청도·경기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전승되어 지역에 따른 유파를 형성하고 있는데, 섬진강의 동쪽인 구례와 남원 등의 소리는 동편제(東便制), 서쪽인 보성·광주·나주 등의 소리는 서편제(西便制), 경기도와 충청도의 소리는 중고제(中古制)라 한다.

  • 판소리명창 박동진씨 발표회
  • 판소리명창 박동진씨 발표회
    (1969)
  • 제2회 대한민국음악제 판소리 공연
  • 제2회 대한민국음악제 판소리 공연
    (1977)
  • 판소리의 고수
  • 판소리의 고수
    (1996)

평민과 양반이 함께 즐기던 판소리

조선 중기 이후 남도 지방에서 발달한 판소리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시작되어 19세기 말에는 ‘판소리의 황금시대’라 불릴 정도로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18세기 중엽에 이미 열두 마당의 고정된 레퍼토리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한 마당의 길이가 길지 않았다. 당시 열두 마당에는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무숙이타령(왈자타령), 장끼타령, 가짜신선타령(대신 숙영낭자전을 넣기도 한다)이 있었다.

평민들 사이에 인기가 있던 판소리를 양반들도 함께 누리게 되면서, 사설과 음악이 양반들의 취향에 맞게 바뀌어 어려운 한문이나 고사가 첨가되고 소리에도 무게감이 실리게 되었다. 또한, 강릉매화가·변강쇠타령과 같이 서민적인 재담이 많은 것은 도태되고, 적벽가, 심청가, 춘향가와 같이 사대부들이 공감할 수 있는 판소리는 계속 발달하였다.

구한말 최초의 전통예술극장 격인 원각사(圓覺社)가 생기면서 판소리를 변형시킨 창극(唱劇)이 성행하였고, 극장 무대에 오르는 소리꾼들도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 시작되어 판소리 전수에 노력하였으며, 1970년대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로 판소리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 장단에 맞춰 판소리 한자락
  • 장단에 맞춰 판소리 한자락
    (1985)
  • 판소리꾼
  • 판소리꾼
    (1988)
  • 대한민국 국악제
  • 대한민국 국악제
    (1989)

판소리를 창극화하여 무대에 올린 ‘국창(國唱)’ 송만갑

송만갑(1866~1939)은 조선 말, 일제강점기의 명창이다. 동편제 판소리의 본고장 전남 구례읍의 동편제 명문가에서 태어났는데, 증조부 송흥록, 할아버지 송광록, 아버지 송우룡 등 3대조가 동편제 소리꾼이었다. 13세 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재롱으로 불러본 것이 청중을 감동시켜 명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서울로 올라와 고종 앞에서 ‘어전광대(왕 앞에서 소리하는 사람)’의 영예를 누리며 사헌부의 정육품(正六品) 벼슬인 감찰직에도 올랐다. 원각사 간부까지 지냈으나 원각사가 없어진 뒤에는 충정공 민영환과 함께 중국·미국 등지를 다니기도 했다.

송만갑은 춘향가, 심청가를 창극화하여 무대에 올렸으며, 유성기 음반에 다수의 판소리를 녹음하였다. 서편제의 대가 정창업의 소리에 감복, 자신이 배운 동편제에 서편제의 발랄하면서도 구성진 요소를 가미하여 독특한 스타일을 개척하였다. 이로 인해 가문에서 쫓겨났고, 동편제 명창들에게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청중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리를 불러 인기가 높았다. 2000년 전라남도 구례읍 백련리 그의 생가 일대에는 동편제판소리전수관이 건립되었다.

신재효의 평생 연구로 판소리 다섯 마당 체계화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이자 작가로 가선대부, 호조참판 등을 지낸 신재효(1812~1884)는 그때까지 구비문학에 지나지 않았던 판소리 열두 마당을 30년에 걸쳐 6개 마당으로 재정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흥부가), 변강쇠가, 토별가(수궁가), 적벽가 등으로 체계화하였다. 현재 변강쇠가를 제외한 다섯 마당은 모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중인 출신으로 재산이 넉넉했던 신재효는 판소리 명창들을 후원하는 한편 판소리 연구에 몰두, 성조가(成造歌)·광대가·도리화가 등의 창작 단가를 만들어 『신오위장본』이란 책으로 묶었다. 원래는 남자들이 하던 판소리를 여성에게도 가르쳐 그의 제자 진채선이 최초의 여창이 되었으며, 이후 허금파, 강소춘, 이화중선, 박녹주 등 여창들이 등장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성 옆에 국가민속문화재 제39호인 신재효 고택이 있고, 신재효 고택 옆에 고창판소리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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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제1569호] 판소리 춘향가 완창(1985)

"제비 몰러 나간다~”로 판소리 알린 박동진

박동진(1916~2003)은 판소리 다섯 마당의 완창 발표를 정착시킨 명창이다. 한 해에 한 곡씩 시도를 했는데, 1969년 ‘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5시간, ‘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해냈다. 이후에도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 등을 복원해 완창 발표를 가졌다. ‘성웅 이순신’, ‘성서 판소리’ 등 새 판소리를 만들었으며,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 단장에 취임하는 등 판소리계 중진 인사로 활약하며 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무대를 가졌다.

1981년 미국 일주 공연에 참가하였으며, 1982년 미국에서 ‘성서 판소리’를 발표하였다. TV코미디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고, "제비 몰러 나간다~ 제비 후리러 나간다~" 로 시작하여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여~”로 끝나는 광고에 직접 출연도 하는 등 판소리를 대중에 알린 공로는 독보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8년 고향인 충남 공주의 생가 터에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을 개관하였다.

세계인의 심금 울린 판소리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는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아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제2차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었다. 2003년 8월에는 판소리 다섯 마당이 링컨센터페스티벌, 에딘버러페스티벌 등 세계적인 음악축제에 초청되어 ‘에딘버러비평가상’을 수상하는 등 호평을 받았다.

설화, 무가, 광대놀음, 한놀음, 시나위, 민요, 정악 등 다양한 우리 전통무형문화유산의 집합체인 판소리는 오랜 세월 많은 명창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달한 음악으로써 앞으로 시대에 맞게 형성, 발전시켜 나갈 음악 장르다. 최근 젊은 세대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와 협연을 통한 퓨전 음악을 선보이는 등 새로운 통로를 모색하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국립극장에 소속된 국립창극단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문화재도록-도지정문화재편』, 전라남도, 1998.
  • 『판소리문화사전-유네스코 지정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박이정, 2007.
  • 『동편제 명창 송만갑의 예술세계』, 민속원, 2010.
  • 『얼씨구 좋다 판소리(빛나는 유네스코 우리 유산15)』, 웅진주니어, 2013.
  • 『교주 조선창극사』, 태학사, 2015.
  • 전북일보, 「농악으로 새 옷 입은 '도리화가'」, 2016.7.14.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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