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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 1만 시대

한국여성 특유의 강인한 호국의지는 신라 화랑의 전신인 원화(源花) 제도부터 시작된다. 원화 제도는 청소년들에게 효도·우애·충성·신의 등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질서를 익히게 하고 예절과 무술을 연마하도록 하는 것으로, 576년(진흥왕 37)에는 300∼400명 무리의 우두머리인 원화에 여성을 임명하기도 하였다. 이는 종교적 의례에서 당시 여성이 차지했던 지위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어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 시에도 여성들은 놀라운 지략과 용기로 국난을 타개하는데 일조를 했고, 일제강점기에도 의병단 조직, 항일 결사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였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실시하려했으나, 지도할 교관이 없었다. 이에 통솔력 있고 유능한 체육교사를 교관으로 양성해 육군 예비역 소위로 해당 학교에 배속하는 ‘배속장교 교육’을 실시했다. 1949년 6월 30일 입교해 9월 1일 ‘제1기 여자배속장교’가 된 32명이 대한민국 최초 여군 장교인 셈이다. 훗날 초대 여군 병과장이 된 교육대장 김현숙(金賢淑)과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낸 제2구대장 김정례(金正禮)가 당시 여군활동의 주역이었다.

대한뉴스 제811호] 여군단 창설
[대한뉴스 제811호] 여군단 창설(1971)

6·25전쟁이 발발하자 ‘여성도 군문(軍門)으로!’ 라며 출전을 자원하는 여성이 쇄도했다. 1950년 8월 대구여중과 부산 대신초등학교에서 실시한 '여자 의용군' 제1기생은 18∼25세의 미혼에 중등교(6년제) 졸업 이상의 학력자로 필기시험과 엄격한 신체검사를 거쳐 선발됐다. 2,000여 명의 응시자 중 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500명으로 9월 6일 부산에서 ‘여자의용군 교육대’를 창설함으로써 본격적인 여군시대를 열었다. 이 때문에 9월 6일을 여군창설기념일로 삼고 있다. 1950년 낙동강 전선에서는 총 반격작전을 하면서 해병대는 학생과 교사 등 3천여 명을 모집해 3개 보병대대를 증편했는데, 그 중 126명의 여자의용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간호, 홍보, 예비 서무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휴전회담으로 전선이 교착상태에 있던 1951년 장교 4명을 제외한 전원이 제대했다. 1948년 5월 서울 영등포에 국군 최초의 제1육군병원이 세워졌으며, 전문 간호 인력 충원을 위해 민간병원 면허 간호사를 간호장교로 임관시키는 ‘간호장교 후보생’ 제1기 31명을 선발했다. 1949년 1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인 박경원 등 3명이 입대와 동시에 중위로 임관해 공군 최초의 여군이 됐다. 같은 해 2월 15일 육군 항공사령부 예하 여자항공교육대가 창설되어 여자항공병 제1기생 15명이 입대했다. 하지만, 이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산명령이 내려져 실제 활동하지는 못했다. 이와 같이 6.25전쟁 중 창설된 여자의용군과 각 군 간호장교, 간호군무원 등에 자원입대한 여성들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참전했다. 군번 없는 민간 여성들과 여학생들은 여자학도의용군으로 전투에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여성들도 있었다.

여자의용군 행진 썸네일 이미지
여자의용군 행진(1952)
여군창설 4주년 기념식 썸네일 이미지
여군창설 4주년 기념식(1954)
여군훈련소 개소식 및 여군창설 5주년 기념식 썸네일 이미지
여군훈련소 개소식 및 여군창설 5주년
기념식(1955)

자주 국방에 ‘금녀의 벽’은 없다!

여군은 크게 일반병과인 여군과 특수병과인 간호장교로 구분된다. 간호병과에서는 2001년 1호 여성장군을 배출하였다. 1948년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간호장교단으로 출발해 6.25전쟁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사방이 포위됐을 때에 끝까지 남아 부상병을 돌보다 철수를 했으며, 이후 월남전, 걸프전, 평화유지군(PKF) 등에도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육군의 경우, 1959년 1월 여군과가 육군본부 여군처로 개편되고, 1970년 여군단으로 승격하였다. 1990년 여군단을 해체하고 1991년에는 여군병과를 폐지했다. 이때부터 여군도 남군과 같이 보병, 정보 등 일반병과로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2015년 군종, 포병, 방공병과가 마지막으로 문호를 개방해 여군은 육군의 모든 병과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1997년 공군사관학교에 여생도가 최초로 입교하였고, 1998년 육군사관학교, 1999년에 해군사관학교가 여자 생도를 받아들였다. 2001년 공군·해군 여군사관후보생을 배출함으로써 여군이 근무하지 못하는 영역은 이제 없어졌다. 2002년 11월 1일 ‘국방부 여군발전단’이 창설되어 육·해·공 여군 관련 정책개발, 여군의 고충 처리와 대외적으로 군내 여성대표기관으로서 임무를 병행하고 있다.

보조에서 지휘자로! 조국의 하늘·땅·바다를 지키는 여군

2002년 육군에서는 여군 소위 20명이 처음으로 소대장이 되었고, 첫 여성장군을 탄생시켰다. 공군은 2001년부터 여군 장교와 부사관을 배출했으며, 2003년 3월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 3명을 실전배치했다. 또한, 2015년 역사상 첫 여군 비행대장 2명이 탄생했다. 해군의 경우, 2002년 여군 함정 근무자가 탄생하여 2003년 전투함에 승선하였으며 3천 톤 급 잠수함(장보고-Ⅲ) 도입을 계기로 앞으로 잠수함에도 여군을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해온 대한민국 여군은 특전사와 해병대는 물론 함정 근무와 전투기 조종사까지 육·해·공군의 최일선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서게 되었다.

간호장교들의 환자 치료하는 모습 썸네일 이미지
간호장교들의 환자 치료하는 모습(1969)
국군의날 기념행사 중 여군의장 대행렬 모습 썸네일 이미지
국군의날 기념행사 중 여군의장
대행렬 모습(1981)
제36주년 국군의 날 여군 행렬 썸네일 이미지
제36주년 국군의 날 여군 행렬(1984)

여군창설 60주년인 2010년 각 대학교에 여성 학생군사교육단(ROTC)이 창설되었으며, 전투병과에서도 최초의 여성 장군이 탄생하는 등 여군의 위상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여군은 재정·법무·인사행정 등 청렴함과 세심함이 요구되는 병과에서 활약이 더욱 두드러져, 2016년 현재 법무병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여성 법무관은 59명으로 장기복무 법무관의 35.8%를 차지하고 있다. 특전사 군가 가사도 40년 만에 수정했다. 2014년 특수전사령부는 군가 '검은 베레모'의 가사 중 '사나이' 부분을 '전사들'로 바꾸었다. 2016년 1월 국방부는 "여군 비율을 빠르게 늘려 2017년에는 약 1만 960명이 될 것이며, 2020년까지 여군 장교 7%, 부사관 5%로 늘리기로 한 기존 계획을 내년(2017)에 달성하겠다"고 했다. 2016년 7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여군은 총 60만 군인 중 9,783명이다. 창설 당시 타자수 등 남자군인의 보조 역할을 했던 대한민국 여군은 이제 전투기 편대장, 해군 고속정 정장 등 지휘자로서 조국의 하늘과 땅과 바다를 누비며,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임무를 다하고 있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http://terms.naver.com)
  • 『한국의 여군』, 형설출판사, 2013.9.9.
  • 연합뉴스, 「한국여군 지위는 '세계최고' 수준」, 2003.8.24.
  • 연합뉴스, 「21세기 파워…….창설 55주년 대한민국 여군(종합)」, 2005.9.6.
  • 국방일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대한민국 여군’」, 2015.9.3.
  • 아시아경제, 「한국군 최초 여군은 ‘학도호국단 교련교사’」, 2015.9.4.
  • 서울신문, 「수천 번 강하·무술의 달인… 놀라운 여군 특전사들」, 2015.9.4.
  • 국민일보, 「여군 1만 명 시대…….여군 창설 65주년」, 2015.9.7.
  • 국방일보, 「첫 '여군 비행대장' 2명 탄생」, 2015.12.21.
  • 아시아경제, 「국방부 "여군 비율 빠르게 늘린다"」, 2016.1.22.
  • 국방일보, 「男다른 女봐라!…선진강군의 필수조건」, 20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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